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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용인

재일교포 ANA Hotel- KYOTO 곽유지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by SL. 2014. 2. 23.

우리 모두에게는 꿈이 있다.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이루고 싶은 꿈을 땀과 노력을 통해 얻으신 분을 직접 만나보았다. 내가 만나본 곽유지 회장님은 내가 상상하던 카네기같은 분이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는 열심히 일해서 재벌이 , 노년을 나눔과 베품으로 보냈다고 한다

올해로 95세가 되신 회장님께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홀로 일본에 건너가서 천신만고 고생 끝에 결국은 일본의 전일공 호텔, 오카야마 세토 호텔 및 스파 리조트, 한신관광, 긴키관광, 긴키산업신용조합 등을 소유한 재벌이 되고 한국에도 신한은행 설립멤버이자 신한금융그룹의 대 주주가 되셨다. 늘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던 곽 회장님은 현재까지 일본에서 큰 사업체들을 운영하시면서 장학재단을 만들어 많은 학생들을 도와주고, 고려대학교, 서울대병원 등에 많은 기부도 하시고 계시다.
 

기자:  “회장님께서는 왜 일본에 가게 되셨으며, 어떻게 사업을 크게 성공 시킬 수 있으셨나요?

 

회장님:  “내가 어렸을 때는 일제강점기 시절이라 한국에서는 큰 꿈은 꿀 수 조차 없었단다. 큰 세상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때는 좀 더 큰 세상이 결국 일본이었단다. 18세에 혼자 아무도 없는 일본에 갔으니 어떤 고생을 얼마만큼 했는지는 지금도 일일이 다 말해주기가 힘들 정도란다. 노력하고 또 노력한 것 밖에 없지. 힘들다고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단다.
 

기자: “회장님께서는 성공을 한 후에도 한국을 잊지 않고 계속 한국을 위해 애쓰셨는데, 그 중 어떤 점이 가장 기억에 남으시나요?

 

회장님; 1970년대 초에는 한국이 살기 힘들 때라 도둑도 많았다. 그 시절에는 한국 정부 기관에도 오토바이가 몇 대 없어서 도둑잡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단다. 재일교포 사업가들에게 제안을 해서 힘을 모아 부산항에 3 8백대의 오토바이를 배에 실어 한국에 보냈을 때 한국 정부에서도 좋아했지만 우리들도 정말 기뻐했었지. 그리고 그때는 고 박정희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하던 때라 우리 재일교포들도 새마을운동을 지원했지. 조국을 떠나 생활하는 교포들은 조국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또 국제적으로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지 모른단다.
 

기자: “일본이나 한국의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가지고 계시고 또 대학교들에게도 많이 지원하셨다는데, 그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회장님; “나는 모든 것을 혼자 개척해 나가야 했고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다. 그때 결심한 것이 나중에 기반을 잡게 되었을 때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었지. 힘든 시대를 지내온 나는, 나보다 젊더라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과 학생들을 위하여 교육을 하는 분들을 존경한다. 공부를 하고 싶은데 환경이 힘들어서 못하는 사람들을 조금씩 도운 것 뿐 이야.

 

기자: 평소에 가지고 계신 생활습관 중에 어린이들에게 권해주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회장님; 내 나이가 90이 넘었어도 아직도 수첩에 일일이 계획을 쓰고 정리하는 습관을 갖고 있단다. 주어진 일을 열심히 성실하게 하는 습관은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게 한단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어.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어온 인생은 후회가 없지. 건강하게 잘 크거라.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회장님을 만나러 갈 때보다도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마치 새로운 날개를 단 것처럼……


 

 

 

청산 郭裕之 會長님의 출생, 성장, 과거, 현재를 알아본다.


 

創造人 郭裕之 吾日三省吾身
 

“하루에 세가지 면으로 자신을 반성해 본다”

靑山先生은 스스로 老子의 지도자론을 기초로

첫째  情으로써 직원들을 보살펴 나갔으며,
둘째  솔선수범하여 모범을 보이려 애썼으며,
셋째  공명심을 자제하여 앞서 나가기 보다
      뒷전에 서기를 자처하며 생활하게 된다.

 
 
 

⊙ 산과 물이 아름다운 錦山에서  태어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1917년 10월 3일 포산 곽씨 28世손으로 비교적 여유로왔던 양조장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 도일

 

1910년 한일 합방으로 국권을 피탈당한 후 1930년대가 되자 한국어 말살정책과 創氏 개명을 강요하던 시기로 밥그릇 숟가락까지 수탈당하던 시절이었다.
앞날이 보이지 않던 그때 어린마음에 일본사람들은 잘먹고 잘살겠지, 일본에 가면 뭔가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청운의 높은 뜻을 품고 18세의 젊은나이에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일본으로 향했다.
  
 

⊙ 첫 번째 사업, 무역업

고향에서 인삼을 많이 접해보아 인삼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처음에는 한두상자씩 배편으로 한국에 부쳐서 한국 사람들에게 팔았다.
장야현의 인삼은 겉으로 보기엔 한국 인삼과 마찮가진데 품질은 한국인삼에 크게 뒤지지 않지만 가격은 거져인 셈이었다.
장야현의 인삼을 한국 인삼의 10분의 1 가격에 내놨고 인삼은 한국에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재미삼아 시작한 인삼 수출이 본격적으로 되고 한두해를 지나고 보니 수중에 돈이 모이기 시작했고 꼬깃꼬깃 모아 둔 돈을 보면 모든 어려움도 잊을정도로 기쁜 나날이었다.
기업을 시작할 수 있는 쌈짓돈을 마련해준 인삼을 보면 지금도 그 때 일을 잊을수 없다.

⊙ 못 공장을 창업하다
 

“ 물건과 물건을 든든하게 이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못을 만들고 싶었다. ”
철을 구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 철사를 일일이 손으로 끊어서 못을 만든 덕분에 손에는 물집이 생겼으나 주문이 밀렸고, 노력한 댓가가 있었기에 충분히 행복했다. 못을 만들어 팔던 그때 그 시절 단순히 사업을 위한 작업만 했다면 미약하나마 지금의 성공을 이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귀한 강철로 만든 못은 견고하게 나의 가슴속에 希望이라는 글자를 못질해 주었다. "


⊙ 레져 산업, HOTEL SETO & OHASHI SPA RESORT
  

철공장을 운영하며 못을 만들면서 종자돈을 모은 것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온천도시 오카야마의 바닷가 독수리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산의 기운이 온몸에 전해진다는 속설이 있는, 돌도있고 산도 있으며 깨끗한 물도 흐르는 휴양지로 적함한 터를 잡아 기초를 닦았다.
온천으로 유명한 일본이지만 24시간 체체로 운영되는 곳이 거의 없던 시대에 24시간 쉬지않고 문을 연 것이 정확하게 들어 맞았는지 사업은 별 무리없이 진행되었고 지금은 SETO(세트)호텔과 OHASHI SPA RESORT로 발전했다.
 
  ▶ 땀이 흐르지 않는 곳에 결코 기쁨이 맺히지 않는다.
  ▶ 큰 기쁨일수록, 큰 만족일수록, 그만큼 큰 댓가를 치러야 한다.
  ▶ 댓가는 어디까지나 땀과 눈물과 피로 치른 것이라야 주효하다.


⊙ 祖國에 세운 裕進관광 주식회사
 
 하루가 다르게 사업이 번창해가던 60년대 성공의 열매를 따는 기쁨 뒤에는 웬지 모르게 허전함이 있었다.
바로 나의 조국이었다.
고민의 날을 보내다가 나의 조국 한국에서도 사업을 일으켜 한국의 현대화를 돕고자 하는 생각으로 서울에 유진관광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지금의 무교동 서울파이낸스 센터 자리에 있던 엠파이어 호텔을 매수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엠파이어 호텔역시 술풍에 돛단 듯이 순항을 거듭했다.
“보수를 하는것보다 새로짓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으로 84년 유진관광주식회사 이름으로 운영하던 엠파이어 호텔을 헐고 그 자리에 특급호텔을 재건축하기 위해 도심 재개발 사업 시행 인가를 받았다.
87년 싱가포르, 홍콩의 샹그리라 호텔 체인과 합작계약을 체결한적도 있었고 이런저런 사연으로 서울 파이낸스 센터를 건축하게 되었지만 지금은 유진관광주식회사는 손을 뗀 상태이다.
  
 
⊙ 오사카 阪神관광 주식회사
 

강이 많고 다리가 많아서 물의 도시, 혹은 다리의 도시로 불리는 오사카는 상점에서 쏟아내는 네온 불볕 때문에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이다.
이국이라는 외로움 때문에 한국동포가 많이 사는 지역으로 가고 싶어 오사카에 판신관광주식회사를 창업하였다.
여러 가지 무역업을 위주로 활발한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 킨키산업 신용조합
  

킨키 산업 신용조합은 광범위한 영업기반을 바탕으로 전국 3위의 대형 신용조합이다.
수신고 차츰 높아져 가고 있는 킨키 산업 신용조합을 보면 무럭 무럭 자라나는 창밖의 화분을 보는 듯이 기분이 좋다.
나를 비롯한 킨키산업 신용조합의 임직원 모두는 신뢰받는 건전 금융으로 기쁨을 주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 新韓銀行의 株主가 되다.

한국에서 금융사상 처음으로 在日교포가 주축이 된 순수 민간자본에 의해서 설립된 은행이 바로 신한은행이다. 82년 7월에 정식발족 사업을 하는 재일교포 사업가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20여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진취적인 기업문화와 구성원 전체의 비젼공유, 변화와 개혁의 지속적 추진원칙과 룰에 입각한 투명경영등을 통해 오늘날 알찬은행, 우량은행으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 ANA호텔 KYOTO

 우리나라의 천년고도 경주에 비견되는 교토에서 최고 번화가인 二條城앞에 있던  일본의 자존심과  권위가 서려 있는 일본의 재벌 미쓰이(三井) 본가를 사들였다. 1953년의 일이다.
미쓰이 본가를 53년에 사두었다가 1963년 二條관광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의 호텔업을 시작했다.
1982년 호텔 노휴화로 인한 대대적인 개조공사를 시작 4년여의 우여 곡절을 거듭한 끝에 1986년 8층의 새로운 초 현대식 호텔로 신축하였다.
이듬해인 1987년이 되자 새로 단장한 호텔을 일본의 유명한 호텔체인인 ANA항공호텔에 임대해 주었다. 全日空이라 불리는 ANA항공을 일본 최대의 항공사이며 세계 6위의 항공사이다.
ANA항공 호텔 체인은 87년에 임대해서 2001년 다시 경영권을 되돌려 받기 까지 우리 호텔을 빌려쓴 것이다.
지금은 내가 경영하는 유진관광 주식회사가 호텔을 경영하고 있다.
  
 
奉仕人 郭裕之의 江줄기를 되짚어본다.

奉仕人 郭裕之 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돌아가 몸과 마음을 바친다”

“누림에서 나눔으로”  한 사회의 상류층이 누림에서 나눔으로 전환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의무이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쓰라 바로 지금이 나눔의 기쁨을 나눌 때이다." 靑山선생의 정열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기 위한 남다른 모습이 있다.
“물처럼 사람들에게 스미고 물처럼 대지를 적시고 흐르는 長江........”
“봉사자란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사회봉사를 하는 사람을 뜻한다.”
“봉사는 망설임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 개척해 나가고 혼자 결정해야 했고 손은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다. 그때 결심한 것이 나중에 기반을 잡게 되었을 때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이었다.”
“가장 훌륭하게 봉사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을 거두어 드린다고 생각된다."
‘나’ 자신을 넘어 ‘남’을 생각하고 ‘남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본관 전경

별관 전경

 

“靑山不老, 나는 산을 좋아하고 소나무의 푸른 빛을 좋아하고 나의 인생도 산처럼, 소나무의 기상처럼, 늘 푸르고 변치 않는 젊은 마음과 기개를 가지고 살거라” 하는 기원을 담아 나의 號를 靑山으로 지었다.
내고향 금산의 중도리에는 과분하게도 靑山 郭裕之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보잘 것 없는 나에 대한 칭송의 글이 새겨져 있다. 2m 가까운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공적비는 거북이가 비석을 바치고 있고 비석 상단에은 용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고향사람들에게 靑山회관을 지어드리게 되었는데 공적비로 화답한 것이다.

 
⊙ 곽유지 선생 공적비 

  선생은 지령이 정기를 머금고 산하에는 충혼이 숨쉬는 우리고향 금산에서 태어나신 분으로 인간애와 애향심이 유달리 크신 분이시다. 선생께서는 항상 고향을 잊지 않으시고 마음을 쏟우시어 금산군내 곳곳에 그문의 정성어린 애향의 꽃을 피우셨다.
- 중 략 -
先生은 근검절약 하시는 생활로 모으신 淨財를 아낌없이 희사함으로써 금산군청을 비롯하여 富利중학교, 금산중앙초등학교, 남일초등학교의 모습이 새로워졌으며 독립유공자비 건립기금과 체육성금등은 물론 장학사업에도 많은 사재를 헌금하셨으니 선생의 높은 뜻은 그곳에서 꽃을 피웠으며 그 향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선생은 端宗때 충절을 지키신 判書 郭師의 十七世손으로써 선조의 지고하신 정신을 이어 선조를 모신 정의사를 개축단장 하셨으며 始祖 郭鏡선생 기단앞에 제각 同源齋를 건립한 때도 거액을 부담하셨고 이곳 비호산 기슭에 문화창달과 복지 증진의 전당으로 ‘군민복지회관’을 건립하셨으니    - 중 략 -
이에 十一만 군민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여기 선생의 높으신 뜻과 빛나는 공적을 기리 아로새겨 이 공적비를 세운다.
 
1983년 11월. 문학박사 최원규 撰
조종국 씀

  
⊙ 郭裕之 事蹟碑

 

- 전 략 -
公은 단종때 충절을 지킨 郭師의 사당 정의사 모습을 새로 개축하고 주위를 미려하게 단장했다.


경기도 파주군에 위치한 시조의 묘소앞 同源齋 건립때도 다액을 부담했고 후손들을 위한 장학사업에도 많은 재산을 희사했다. 언제나 바른 생각과 바른행동은 생활의 신조로 삼고 진리와 선행으로 인류 구원의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공의 높은 뜻을 기리고저 여기 사적비를 세운다.
문학박사 곽종원 지음
배길구 씀

 
⊙靑山 玄風 郭公 裕之 공적비
 

- 전 략 -
公은 1974년 甲寅 시조이신 諱 鏡의 연고지 파주 곽능골의 설단사업과 동원재 건립에 거액을 희사 했으며 76년 병진 대동보 편찬, 제작 비용 일체 특히 86년과 87년에 문헌공 ‘묘역정화사업’과 ‘묘전비’건립 ‘石川재’ 신축을 전담 완공, 장학재단을 설립운영, 또 吾郭의 본향에서 一문 三강으로 추앙받고 있는 충렬공 諱 越 祖를 봉안한 ‘성인재’보수비 헌납, 금산군민을 위한 ‘군민회관’ 마을 별관 신축 등 - 중 략 -
평소 바른 언행을 신조로 ‘忠孝世業’하고 ‘淸白家聲’하는  조상의 유훈을 성실하게 실천해온 공의 고귀한 뜻과 숭조정신은 우리가문의 ‘표상’이요 ‘귀감’으로 문중의 자랑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 중 략 -
이에 문중합의로 公의 至孝大功을 길이 장전하고자 ‘문헌공종회’가 삼가 글을 짓고 이공적비를 배우다.
2004년 5월
문헌공 종회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
기환, 병기, 찬호, 태걸, 채순, 종석

 
 
 
⊙ 경찰에 MOTORCYCLE을 기증 

까만 가죽 잠바에 하얀 철모, 검은 선그라스에 가죽부츠, 가격도 꽤나가는 DAVIDSON MOTOR CYCLE을 타고 도로를 누비는 교통경찰을 남자라면 한번쯤 되고 싶은 직업일 것이다.
70년대초 일본에서의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서 예전보다 자주 고향을 찾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당시 경찰청 외사과에 근무하던 경무관을 알게되었다.
그 경무관으로부터 간곡한 부탁을 받았는데 재일교포들이 MOTOR CYCLE를  들여와서 경찰에 희사 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건너가 몇몇 재일 동포들에게 한국경찰의 애로사항을 설명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조국의 일이라면 언제든지 발 벗고 나서는 재일동포 사업가들은 선뜻 성금은 내놓았다.
그들이 내놓은 성금으로 싸이드카가 달린 일제 MOTORCYLE 3천 8백대를 사서 배에 실어 한국에 보냈다.
한국경찰측에서 이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 새마을 운동에 참여

 

한국 정부측과 가까워진 나는 70년대를 맞으면 좀더 적극적인 지원을 하게 되는데 바로 ‘새마을운동’을 돕는일이었다.
40대이상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새마을운동 노래의 가사를 기억할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재건운동에 착수하기 위해  자조,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마을 가꾸기 사업을 제창하고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재일 동포들도 이사업에 적걱 협조하고 지원 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국을 떠나 생활하는 교포들은 조국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또 국제적으로 대외적으로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든든하고 편안한 일인지 모른다.
마치 시집간 색시가 친정이 든든하고 걱정이 없어야 마음이 편안하듯이.............


⊙  靑山 장학 재단
 

◇ 힘든 시대를 지내온 나는 나보다 젊더라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을 존경한다.
◇ 그리고 학생들을 위하여 교육사업을 하는 분들 역시 존경한다.
◇ 그들은 잠든 이를 깨워서 지식을 일깨우는 전령사이기 때문이다.

 

◈ 사례1 

한국근대 교육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고 배상명 박사는 일제치하에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1933년 상명고등기예학원을 설립했다.
어려운 시절 전 생애를 오로지 낙후한 한국의 여성교육 중흥을 위해 헌신해온 배상명 박사의 이야기에 감동하던 차에 당시 상명여대 총장으로 봉직하던 곽종원 총장과 면식을 갖게 되었다.

곽총장은 포산 곽씨 종친이기도 하지만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장학재단에 관여할 시간이 없었

고 남 앞에 나서서 도와주는 것도 꺼려졌기 때문에 곽총장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 놓은 상태 였다. 단순한 장학금 기부가 아니라 투자금으로 기부해서 그 이익금으로 학생들을

 

도울 수 있는 이른바 동화책에 나오는 ‘날마다 황금알을 낳는 닭한마리’를 기증한 것이었다.
일단 장학금을 투자한 후에는 장학재단 측에서 어떤 분야에 사업을 하는지 수익금이 얼마나 되는지 등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더 노력한 댓가로 번돈으로 학비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도리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행복도 습관이라고 했다.
‘행복은 그것을 느끼고 즐길줄 아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라 했다.’
<사진>1960년대 진명여고 교장과 함께


◈ 사례2

60년대 또한번의 교육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인 ‘진명여학교’의 교장선생님이신 박용경 선생님에게 장학금을 기부 하게 되었다.

진명학교는 기존의 여학교들이 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인데 반해 1906년 엄원준이 세운 사립인 진명여학교를 설립한 학교로써 여성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황실로부터 대지를 희사받아 종로구 황성동에 학교를 세운 것이다. 미약하나마 나의 장학 사업에 혜택을 받은 학생들은 사회 각분야에서 자신이 받은 사랑을 부지런히 베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 사례3
 

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경민학원 이사장 홍우준 박사는 나보다 연배는 몇 년 아래지만 어려운 시기인 1923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온 분이다.
6·25 한국전쟁이후 거지들을 보고 그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거지가 되어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고아와 불량아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그들이 다시 거지로 돌아가지 않게 하신 분이시다.
거지들과 생활하며 교육의 필요성을 체험한 홍박사는 소외된 사람에게 공부를 시키고 기술을 가르쳐 사회로 내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맡기신 아름다운 일이라고 믿고 1967년 자신의 호를 따서 학교법인 慶旼학원을 설립하게 됐다.
현재 대학교 중·고등학교 유치원까지 경민학원의 학장으로서 왕성한 교육사업을 펼치고 있다.
평소 ‘민족교육은 제2의 독립운동이다.’라는 생활신조는 교육에 타신한 그의 존경스러운 모습에 나는 후학 양성에 보탬이 되라고 아무런 조건없이 적지 않은 돈을 기부했다.
의정부 일대를 교육동산으로 일구어 가는 그의 모습에서 나의 장학사업도 함께 무르익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누구든지 배움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배움의 기회는 주어야 한다. 배우고 싶지만 기회가 없어서 놓쳐 버리는 사람을 보는것보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교육에 대한 나의 후원도 나의 힘이 닿는 한 끊임없이 이루어 질 것이다.” 
 
여기 소개한 자선사업과 장학사업, 문중을 위한 봉사 사업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 2005년 12월에는 고려대학교에 10억기부 

 

 

관련기사 

 


◈ 2005년 종친회 발전기금 
 

광주 15억, 대구15억 서울에 수억등...문중화합을 기원 수십억을 기부한 사실도 나무나 잘 알려진 일이며 광주의 청산회관은 이미 준공 되었으며 대구의 청산회관도 금년 초가을에 준공될 예정이다. (2006년 봄기준)

 

 

 

본향대종회

광주.전남대종회


 
⊙  대덕사
 

당초 청산 선생이 세웠던 경기도 용인에 시조 사당인 대덕사의 개축을 위해 20억 이상의 거금을 투입 금년 5월 시향제 때에는 전국의 일가 종친들이 구름같이 모여 2000여명에 가까운 대 군중이 문집한 가운데 성대한 준공식을 마쳤던 것이다.
힘이 닿는대로 주변 사람들을 도우려는 봉사 정신은 평생을 봉사인으로 살고자 다짐해 온  청산선생의 신념과 좌우명의 소산이라 하겠다.

 

 

 

신축된 대덕사 전경

대덕사 준공식 컷팅
 
 
⊙ 그리운 어머니 
  

▶ 성웅이든 소시민이든 어머니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똑같다. 
▶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어머니 앞에서는 누구나 어리광을 부리고 싶고, 어른이 되어 마음이 복잡할때도 어머니 앞에만 서면 누구나 편안한 마음이 된다. 
▶ 우리의 어머니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난과 아픔을 받기는커녕 외면당하면서 살아오셨다. 뒤늦게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고 싶지만 어머니는 효도의 기회조차 주지않고 세상을 떠나신다. 
 
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항상 조용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가만히 있지 않고
子欲養而親不待 자식은 부모를 잘 봉양하고 싶으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시네 
 
※ 이 말은 이세상의 모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한다는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1991년 고향 사람들의 사랑이 담긴 청산 곽유지 공적비를 선사 받은 나에게 또 하나의 과분한 상이 주어 졌다.

제 1회 금산군민대상의 효도부분의 상을 받은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언젠가 자식하나 잘되기 만을 비셨던 이땅의 모든 어머니와 똑같은 분이셨다.
나역시 살아 생전에 제대로 효도를 하지 못했고 어머니가 가신 뒤에야 뒤늣게 불효를 깨닫는 이땅의 보통아들과 같은 남자인 것이다.

어머님의 白壽宴

어머님의 禮를 모시고

 
 

고베에 모셨던 어머니가 말년은 한국에서 지내 시기를 바라셨기에 지금의 청와대 연무관 자리인 궁정동에 큰집을 지어 모셨다. 집안에 오래된 고목이 있는데 어머니께서 새벽마다 고목나무 아래 정한수를 떠놓고 자식 잘 되기를 기원하셨다.
풍수지리적으로 뛰어난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시던 어머니는 1982년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세상 모든 자식이 그러하듯이 나도 눈앞이 캄캄했다. 인생의 좌표를 잃은 것 같았고 항해사가 나침반을 잃은 기분이었다.
얼마전 오랜만에 용인의 어머님 묘소를 찾았다.
묘소를 보는 순간 왠지 숨통이 트이면서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마치 원시림에서 풍겨나오는 내음인양 어머니의 젖가슴이 그리워진다.
시계를 풀고 어머니 품에 머리를 묻고 한참 푹 자고 싶다.”
“어머니! 당신은 항상 내마음속에 계십니다. 어머니는 다른 모든 사람을 대신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자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이 사회를 위해 조그만 봉사를 해나가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께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을 나에게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제서야 말한다.    “엄마, 미안해요  엄마, 사랑해요. 라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회에 봉사하시는 自然人 郭裕之 先生!  

남은 여생 즐겁게 누리소서.

 

 
관련보도기사 
 
◎ 재일교포 사업가 곽유지 회장은 서울대병원 발전기금 5억원을 기부. 200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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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초현리 정의사의 사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