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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야기/가볼만한축제

재즈의 메카 자라섬

by SL. 2012. 9. 15.

7년 신용불량자, 시골 섬을 재즈 메카로 만들다

올해 9회 맞는 가평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의 인재진 총감독

 

"현재 잔액 0원 입니다"
30대초반 공연기획 실패… 관리비 못내 전기 끊겨 자가용으로 택시 영업도

90년대 차인표 색소폰 바람에…
재즈 기획자 없던 시절, 전용극장 운영하며 공연
2004년 첫 페스티벌 땐 홍수로 공연 취소돼 눈물

영문 모르고 영문과 진학
대학시절 내내 밴드부 생활
악기 연주엔 소질 없었지만 협찬·섭외엔 발군의 실력

남들과 다르게 살자
의류회사 다니다 관두고 결혼 축가 기획사 등 차려
음악 기획자의 길 개척

 

 

핀란드 '포리 재즈'서 영감
섬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한국 가면 꼭 하겠다 결심
가평 공무원과 인연 닿아

음악 열풍 부는 가평
인구 6만에 밴드 24개… 택시기사 교육과정에 3년전부터 재즈도 포함

1996년 겨울 어느 날 밤, 서른살을 갓 넘긴 공연기획자 인재진이 전화기를 들어 통장 잔고 자동응답 번호를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현재 잔액은 0원입니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관리비를 내지 못한 아파트엔 전기마저 끊겼다. 방 안에 켜둔 촛불을 끈 그는 차를 몰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앞으로 갔다. 자정을 넘긴 그곳엔 택시를 잡으려는 여행객들이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그들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저…. 태워다 드릴 테니 기름값만 내실래요?" 그는 이후에도 가끔씩 차를 끌고 나가 이른바 '나라시' 영업을 했다. 중국에서 들여온 인형극이 완전히 망해서 파산 직전이었다. 끼니는 늘 자정 이후에 이른바 '나라시 밥'으로 때웠다. 훗날 그는 이 경험을 두고 "택시 운전을 한 적도 있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인재진은 대학 밴드부에서 음악을 처음 접한 뒤 ‘먹고살기 위해서’ 음악에 매진해왔다.

그러다가 한국 재즈의 기획자 시대를 개척했다.

올해 세계 최대 재즈 마켓인 독일 의 ‘재즈 어헤드’ 심사위원까지 맡았다.

황무지에서 재즈의 메카로 바뀐 자라섬 앞에서 그가 악기를 들고 포즈를 잡았다

 

 

그가 올해 9회째를 맞는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의 인재진(47) 총감독이다. 경기 가평군의 83만㎡(약 25만평)짜리 황무지 섬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재즈 축제장으로 바꾼 이다. 매년 10월 사흘간 열리는 이 축제에 작년에만 무려 18만8000명이 왔다. 잣과 밤, 포도밖에 없던 가평은 세계 재즈뮤지션들이 '꼭 서보고 싶은 무대'로 꼽는 명소다. '자라섬의 아버지'이자 유럽을 평정한 한국 재즈의 보석 나윤선(43)의 남편이기도 한 그를 지난 12일 만났다.

가평읍 내 자라섬재즈센터에서는 한낮에도 음악 소리가 요란했다. 2층 '몽크홀'에서 5인조 밴드가 공연 중이었다. 30여 관객은 모두 가평군 택시기사들. 가평군은 3년 전부터 택시기사 소양교육에 '재즈'를 포함시켰다. "자라섬 관객들을 더 잘 모시기 위해서"라고 했다. 읍내 상점들에는 10월 12일부터 사흘간 열릴 올해 페스티벌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자택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가평에 이사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2006년에 왔어요. 2004년에 페스티벌 첫 회를 열었으니까 3년 만에 여기 정착한 거죠. 사실 2005년부터 여기서 사과농사를 지었어요. 만날 앉아서 머리만 쓰다 보니까 몸으로 하는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과수원 3000평을 빌려서 했는데 3년 만에 망하고 그만뒀죠."

―사과농사로 돈을 벌려고 했던 건가요.

 

"아니에요. '재즈'라는 브랜드를 농산물에 붙이는 실험을 한 거죠. 자라섬에 와본 사람들이 가평 농산물을 좀 더 사주지 않을까 해서요. 그래서 '재즈 사과'라고 이름붙였는데, 한 번도 농사지어본 적 없는 제가 혼자 3000평을 하려니까 턱도 없죠. 농약을 1년에 14번 쳐야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7번밖에 못 쳤어요. 그나마 약 치는 법을 몰라서 농약 절반은 내가 다 먹은 것 같아요. 그렇게 수확한 사과를 아는 사람들한테 전화를 돌려서 팔았죠. 맛은 있었는데 사과가 너무 작아서 상품성이 떨어졌어요."

―페스티벌 때문에 굳이 여기 살 필요까지 있습니까.

"필요라기보다…. 페스티벌을 3회까지 하니까 가뜩이나 많던 빚이 더 늘어난 거예요. 직원들 월급이 18개월이나 밀리고…. 그래서 서울 잠원동에 있던 17평짜리 아파트를 팔았어요. 그 돈으로 월급 주고 빚도 좀 갚고 나니, 살 곳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아예 가평으로 오게 된 거예요."

―작년 페스티벌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왔다면서요.

"작년엔 사흘 중에 이틀이 매진됐어요. 경춘선 전철이 개통된 것도 큰 역할을 했고…. 올해는 용산~춘천 간 급행열차 ITX가 개통돼서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여전히 고민인 것은 지역주민들과 이 페스티벌을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시킬 수 있을까 하는 거죠. 사람들이 자라섬에 와본 뒤 가평이 좋아서 또 놀러오고 해야 지역주민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니까요. 인구 6만명 가평에 20만명 가까이 오니까 상징적인 행사가 됐지요."

 

―가평 사람들은 재즈를 많이 듣습니까.

현재 가평군에는 남녀노소의 밴드가 24개에 달한다. 자라섬 페스티벌이 시작되면서 음악 열풍이 분 것이다. 올해는 '나는 위대한 가평 탑밴드다'라는 경연대회가 열려 12개 팀이 경쟁했다. 평균연령 55세인 '한소리밴드'가 우승해, 올해 자라섬 무대에 선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까.

“아니에요. 제가 충남 당진 출신인데, 중학교 때 서울로 유학와서 외할아버지댁에 살았어요. 외가에는 FM 수신도 안 되는 라디오 한 대밖에 없어서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팔을 불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요. 시골에 살 때 우리 집 앞산에서 해 질 녘이면 동네 형이 트럼펫을 불었거든요. 그게 음악인지 뭔지도 모르던 때였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죠.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했어요. 그런데 영문과는 말 그대로 영문도 모르고 갔어요. 학과 공부는 안중에도 없고 밴드부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처음엔 트롬본을 불다가 나중에 색소폰을 배웠어요. 학창시절 내내 밴드부 활동만 했다고 봐도 돼요.”

 

해마다 가을이면 자라섬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인재진은 그런 관객들 앞에 서서 감사의 뜻을 표한다.

 

작년 페스티벌 무대에 장화를 신고 오른 인재진 총감독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건가요.

“나팔을 불어보니까 저한테 음악 재능이 없다는 걸 금방 알게 됐어요. 제가 잘한 건 다른 거였어요. 연주회 할 때 학교 앞 당구장이나 분식집에서 2만~3만원씩 후원금을 받아오고, 우리에게 없는 악기 연주자를 남의 학교 음대에 가서 공짜로 섭외해오기 같은 일을 제가 도맡아 했죠. 특히 고연전 때 연대는 음대 학생들이 나팔을 부니까, 한 명이 부는 소리가 우리 다섯 명이 부는 소리보다 더 컸어요. 그래서 낙원상가에 가서 밤무대 연주하는 아저씨들을 모아오곤 했죠.”

―졸업 후 취직은 안 했나요.

“나는 어려서부터 ‘남들과는 다르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대학 다닐 때도 남들이 많이 하는 건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취업모임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그저 막연히, ‘다르게 살아야겠다’고만 생각한 거죠. 근데 졸업하고 그저 놀려니까 눈치가 보여서 취직을 하긴 했어요. 한 의류회사였는데 해외영업부에서 한 6개월 정도 일했어요. 밤새도록 스웨터 박스를 컨테이너에 싣고 해 뜰 녘에 퇴근할 때면 뿌듯했어요. 내가 바로 수출역군이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죠. 그런데 그 회사가 기독교 계열 회사였어요. 매주 월요일마다 보는 예배까지는 괜찮은데 두 명씩 나와서 기도를 해야 해요. 결국 제 기도 차례가 오기 직전에 그만두고 말았죠.”

 

 

 

―기도하기 싫어서 사표를 냈다고요?

“하하하. 그런 것도 있었고, 사실은 나의 미래가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어요. ‘이 회사에 10년 있으면 저 팀장처럼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답답해서 못 견디겠더라고요. 지금도 저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알 수 없다는 데 매력을 느껴요.”

―그다음엔 어떤 일을 했습니까.

“1993년 1월에 친구들과 회사를 차렸어요. 그때 ‘벼룩시장’, ‘교차로’ 같은 생활정보지가 히트를 쳤는데, 우리는 ‘제3강의실’이라는 생활정보지를 만들었어요. 서울시내 32개 대학에만 들어가는 무가지였죠. 그 영업도 내가 했어요. 도화지에 창간준비호라는 걸 만들어서 기업마다 찾아다니며 광고를 유치했죠. 한 대기업에서는 30만원짜리 전면광고를 받아내기도 했어요. 그걸 한 학기 내고는 그만뒀어요. 친구들이 못 견디고 다 나갔죠. 결국 회사에 저 혼자 남게 된 거죠.”

―음악과 관련된 일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처음 시작한 일이 결혼식 축가연주 섭외였어요. 음대 학생들을 결혼식에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받았죠. 이대 앞 드레스가게 같은 데로 영업을 다니고 했더니, 5월이나 10월 같은 결혼 성수기에는 한 달에 200건씩 축하연주 의뢰가 들어왔어요. 한 달에 1000만원까지 번 적도 있어요.”

 

 

 

―그 일은 왜 그만두었습니까.

“주말마다 음대생을 100명씩 결혼식장으로 보내다 보면, 반드시 펑크가 나게 돼 있어요. 차가 막히거나 무슨 사정이 생기는 거죠. 그러면 월요일에 사무실로 항의전화가 쏟아져요. 장례사업과 결혼사업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그거예요. 장례식은 정신없이 사흘이 휙 지나가니까 뭐가 좀 잘못돼도 사후에 항의가 적어요. 그런데 결혼식은 몇 달을 꼼꼼하게 준비하니까 뭐 하나라도 틀어지면 신랑 신부가 완전히 ‘뚜껑 열리는’ 거죠. 그래서 축하연주 사업할 때 우리 모토는 첫째가 시간, 둘째가 복장, 셋째가 음악이었어요.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까 너무 힘들고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대형 이벤트에 음악 인력을 공급해주는 사업이었어요. 프로축구 개막식에 사물놀이 100명, 프로야구 응원에 밴드 20명 하는 식이죠. 그때만 해도 그런 기획자 개념이 없었어요. 그걸 제가 처음 했다고 볼 수 있죠.”

―예전부터 재즈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군요.

“제 비밀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하하하. 그런 일들을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음악 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고 공연을 많이 보게 됐어요. 그러다가 점차 행사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식으로 바뀐 거죠. 이를테면 신차 발표회를 할 때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트는 식의 연출을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가 재즈를 접했군요.

“그때 차인표가 TV 드라마에 나와서 색소폰을 잡고 흐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사람들이 너도나도 재즈, 재즈 하는데 재즈 기획자는 아무도 없을 때예요. 저는 이미 재즈 뮤지션들을 많이 사귀었고 재즈가 꽤 괜찮은 음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 해서 재즈 공연도 하고 재즈 전용극장도 운영했었죠.”

―자라섬 총감독쯤 되면 ‘재즈로 태교를 받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요.

“하하하. 1996년 강태환(68·색소포니스트) 선생을 만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이분을 통해서 아티스트의 삶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어요. 대학로 극장에서 강 선생 공연을 제가 기획했는데, 이분은 그전까지 제가 만나온 뮤지션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었어요. 음악도 완전히 아방가르드, 프리재즈였고 쉽게 말해 ‘도가 튼’ 분이었죠. 천원짜리 지폐를 다림질해서 다닌 분이었어요. 돈을 허투루 쓰면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음악을 해야 하니까 돈을 아끼고 검소하게 사시는 분이었어요. 그때 아티스트에 대한 어떤 기준 같은 게 생겼어요. 물론 공연은 쫄딱 망했지만요.”

―그게 재즈전용 무대인 ‘딸기극장’으로 이어진 거군요.

“99년에 대학로에 ‘딸기극장’을 열어서 3년간 재즈 공연만 했지요. 재즈클럽도 많지 않던 때여서 이 극장이 재즈의 메카처럼 됐어요. 처음엔 관객 수보다 무대 위 연주자가 더 많았지만, 나중엔 무대 위에 관객이 앉을 정도로 가득 찼어요.”

―그 ‘딸기극장’이 문 닫을 때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것 같은데요.

“저도 기억해요. 극장 문 닫는다는 보도자료를 들고 신문사에 찾아갔더니 그때 저한테 이렇게 말했잖아요. ‘재즈만 하니까 문을 닫죠.’ 하하하. 그런데 그때 또 저에게 무척 중요한 모멘텀이 있었어요. 2000년 여름에 프랑스 대사관에서 저를 프랑스 재즈 페스티벌에 초청한 거예요. 프랑스 남부의 막시악(Marciac)이란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인데, 거길 갔더니 완전히 별천지인 거예요. 인구 1200명밖에 안 되는 마을에 7000석짜리 극장이 있고 수십만명이 오더라고요. 그걸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 페스티벌에 대한 꿈을 어렴풋이 갖기 시작했죠.”

―그렇게 재즈 페스티벌에 눈을 뜨게 된 거군요.

“2001년에 호주에서 열린 재즈 포럼에도 초청을 받았는데 그때 유럽 최대 재즈 페스티벌인 핀란드 ‘포리 재즈(Pori Jazz)’의 디렉터인 유리키 캉가스를 처음 만났어요. 40여년간 포리 재즈를 해오다가 5년 전에 은퇴한 분이죠. 이분과 친해져서 포리 재즈에 초청을 받았는데, 스팅이나 산타나 같은 사람들과 친구인데다가 집에 밥 먹으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스티비 원더가 앉아있고 하는 엄청난 사람이었어요. 그때 ‘이렇게 멋진 직업이 있구나. 한국에 돌아가서 이걸 꼭 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포리가 자라섬과 비슷해요. 포리도 섬에서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이죠.”

 

 

 

―자라섬 페스티벌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제가 2003년에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를 했는데 가평군 공무원 한 분이 수강생이었어요. 그분이 가평에서 페스티벌을 하고 싶다고 해서 가평에 왔는데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마지막으로 본 곳이 자라섬이었어요. 여름에 비 오면 잠기는 섬이라고 하더라고요. 자라섬을 보자마자 ‘여기라면 될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스티벌 첫회를 열던 때도 재정적으로 매우 나빴던 때 아닙니까.

“그렇죠. 제가 7년간 신용불량자 생활을 했어요. 제가 낚시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꿈이 낚시채널에서 파는 19만9000원짜리 루어낚시 3종 세트를 카드로 사는 거였어요. 그래서 결국 신용카드를 다시 발급받았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루어낚시 3종 세트를 사는 거였죠.(웃음) 중국 인형극 들여왔다가 망했을 때는 하룻밤에 1억5000만원을 빌린 적도 있어요. 공연은 망했지, 중국사람들은 돌아가야 하지, 그날 제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돈을 빌렸어요. ‘나 잡혀간 다음에 사식 넣어주지 말고 지금 30만원만 빌려달라’고 했지요. 그렇게 한 70명으로부터 1억5000만원을 빌렸어요.”

 

 

 

―그렇게 힘들게 페스티벌을 연 첫해에 엄청난 폭우가 왔었죠.

“무대에 홍수가 나서 공연을 다 취소하고 관객들은 불평하지, 연주자들은 동요하고…. 요즘 말로 ‘멘붕 상태’였죠. 공연 취소사실을 알리고 사람들이 섬에서 빠져나가는데 저도 차를 타고 섬을 나갔어요. 그런데 운전하던 직원이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는 거예요. 저도 눈물이 났지만 진짜 꾹 참았지요. 울었다 해도 비를 맞아서 보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사훈이 ‘꾹 참자’라면서요.

“맞아요. 월급 못 받아도 꾹 참자는 거죠. 하하하. 농담이고, 제가 느낀 것이 어떤 한 가지 일을 10년 정도 꾸준히 하다 보면 나름대로 전문가가 될 수 있고 다른 가능성도 보인다는 거예요. 재즈 기획하겠다고 한 사람은 많은 데 꾹 참고 한 사람은 드물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이 자리에 온 것 같아요. 제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재즈 시장이 블루 오션도 아니고 조그마한 웅덩이인데, 저 혼자 퍼먹고 있는 거죠.”

 

재즈가수 나윤선과 결혼 인재진의 아내는 유럽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는 한국의 재즈가수 나윤선이다

 

 

―나윤선씨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외국 활동과 연계해서 일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소개받았어요. 2005년에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였죠. 이야기를 해보니 재즈계 이너서클의 도움이 필요한 아티스트더군요. 그래서 같이 일을 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처음 만난 날 소개해 준 사람한테 제가 그랬어요. ‘나는 나윤선하고 연애를 할 것 같아.’ 그리고 1년여 뒤에 실제로 연애를 시작한 거죠.”

―결혼은 왜 조용히 치렀나요.

“2010년 1월에 했는데 가족만 모여서 치렀어요. 결혼한다고 신문에 실리는 걸 아내가 싫어했고, 저도 나이 먹어서 결혼하는 걸 떠들썩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양가 가족들만 말레이시아의 한 리조트에 3박 4일간 놀러가서 서로 얼굴 익히고 하며 결혼식을 했죠. 나윤선씨는 유럽에서 워낙 인기가 높아서 1년에 7~8개월은 외국에 있는 편이에요.” 나윤선은 음반을 낼 때마다 10만장씩 팔려나갈 만큼 유럽 재즈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녀와 계약한 독일 음반사 액트(ACT)를 두고 “나윤선이 먹여살리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대 2만명 가까이 모이는 자라섬 메인 스테이지 앞의 모습

 

 

―20만명 가까이 찾아오는 축제로 성장하게 된 요인은 무엇입니까.

“민·관과 지역주민의 협업이 아주 잘 된 편이에요. 민간의 전문기획자에게 실무의 전권을 주고도 관은 지원을 아주 잘해줬습니다. 그리고 자라섬은 처음부터 상업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어요. 상업자본이 들어오면 첫해부터 이익을 추구할 텐데 그러지 않았죠. 지금도 누구나 자라섬에 소풍와서 무료로 볼 수 있는 공연이 무척 많아요. 그것이 자라섬이 갖고 있는 일종의 ‘스피릿(spirit·정신)’ 같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외국 연주자들도 이 무대에 꼭 서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아요. 유럽 국가들은 자라섬에 참여하는 뮤지션들에게 항공료를 지원하는 경우도 많지요.”

―어떤 순간에 재즈 페스티벌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까.

“제가 메인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어요. 사람들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많이 앉아 있지요. 메인 무대 앞에 2만명까지 모이거든요. 해가 무대 왼쪽으로 넘어가고 있을 때쯤이에요. 그때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정말 행복해 보여요. 내가 이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아, 정말 기분 좋아요. 정말 깊은 감동을 받는 순간이죠.”

가을 자라섬에서는 한국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무대에서는 세계적인 음악가가 공연을 하고 그 앞에는 열성 팬들이 환호한다. 그러나 그 뒤에서는 잔디밭 위에 돗자리와 담요를 펼친 가족과 연인들이 가장 한가롭고 느슨한 시간을 보낸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럴 것이다. 가을이 되면 그 섬에 가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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