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사랑, 충신의 피 …'이야기 박물관' 개성
2013.06.24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 공민왕릉 등 무덤 20여 기 / 궁궐 불타고 만월대만 남아
개성은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한때 인구가 70만 명에 이르렀다. 중국·동남아·아라비아 등과 교류한 국제도시였다. 23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개성역사유적지구’에는 고려의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는 주요 유산이 포함돼 있다.
개성의 역사유적은 크게 3개 분야로 나눠진다. 고려 왕실의 흔적인 궁궐터와 왕릉(고려왕릉·만월대·첨성대), 도심방어시스템을 보여주는 성벽과 대문(개성 성벽·남대문), 그리고 충신 정몽주를 기리는 각종 유적 및 교육기관(고려 성균관·숭양서원·선죽교·표충각)이다.
◆조선왕릉의 원형 고려왕릉=개성 송악산 북쪽과 만수산의 남쪽 일대에는 고려시대 왕과 왕후의 무덤 20여 기가 남아 있다. 개성역사유적에 포함된 왕릉은 태조 왕건릉(북한 국보유적 179호)과 공민왕릉(국보유적 123호), 고려 29대 충목왕의 무덤인 명릉과 인근 무덤,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덤군인 칠릉떼 등이다.
고려왕릉은 통일신라 말기부터 유포된 풍수사상에 따라 주로 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조성됐다. 3~4층의 기단을 놓은 후 맨 윗단에 봉분을 쌓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특히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의 무덤이 나란히 놓인 공민왕릉의 보존상태가 뛰어나다. 규모·형식에서 조선왕릉의 원형이 되는 무덤으로 꼽힌다. 조선왕릉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왕건릉은 건국시조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가 있다. 도굴로 심하게 훼손됐다가 1994년 새로 보수하면서 고려 때의 원형과 많이 달라졌다. 『고려왕릉』(예맥)을 펴낸 장경희 한서대 교수(문화재보존학)는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훼손된 고려왕릉에 대한 보존논의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고려왕릉은 고려의 대몽항전기 임시수도였던 인천의 강화에도 4기가 남아 있다. 인천시는 지난해 남북 공동으로 ‘고려왕릉군’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충신(忠臣)의 흔적=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숭양서원은 1573년(선조 6년) 개성의 유림들이 정몽주의 집터에 세운 서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의 하나로 정몽주의 글씨와 초상화·지팡이·의상 등이 보관돼 있다. 숭양서원 인근의 선죽교는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곳이다. 1216년 다리가 만들어졌을 때 선지교(善地橋)로 불렸지만 다리 주위에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돋아났다 해서 선죽교(善竹橋)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죽교 옆 표충각(表忠閣) 안에는 2개의 표충비가 있다. 조선의 왕 영조와 고종이 백성들에게 충(忠)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고려 성균관 건물은 현재 고려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고려시대 유물 1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고려 건축의 미=송악산 기슭에 있던 고려의 궁궐은 조선시대에 모두 소실됐다. 현재는 그 터인 만월대만 남아 있다. 궁궐은 사라졌지만 개성 남대문(국보급문화재 제34호)이 남아 고려시대 건축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남대문 안에는 연복사종이 있다. 이 종은 1346년 만들어져 금강산의 연복사에 있다가 1563년 절이 불타자 이곳으로 옮겨졌다. 20세기 초까지 타종돼 개성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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