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12
2011년 경제를 개방해 새 투자처로 주목받는 미얀마에 한국 기업인이 도착하면, 먼저 공항에서 환전하면서 놀란다.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500달러(한화 약 56만 원)를 현지 화폐인 차트로 바꾸면 서류 봉투 하나 가득 차는 지폐를 받기 때문이다.
최고액권인 1만 차트부터 5천 차트, 1천 차트, 500 차트 등으로 골고루 받다 보면 그렇게 된다. 이는 차트의 환율이 달러당 약 1천으로 달러에 대한 차트 가치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한국 원화의 환율이 차트 화의 환율과 비슷하다. 원화는 11일 현재 달러당 1천119원 정도다. 동남아시아에서 갓 개방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화폐와 수출 규모 세계 6위인 한국 화폐의 대외 가치가 거의 같은 수준이다.
한 경제인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는데 외국 손님이 오거나 하면 원화 화폐의 액면가가 너무 커 창피스러울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가령 식사 한 끼 하고 10만 원을 지불하면 외국인들은 지불하는 돈의 액면가가 너무 커 의아해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10만 달러는 원화로 1억1천만 원 이상 되는 돈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유일하게 달러 당 환율이 4자리 수인 나라다. 2002년 유로화가 도입되기 전 리라 화폐의 달러당 환율이 한국 원화보다 더 높았던 이탈리아를 방문한 관광객들은 피자 몇 판 먹고 한 뭉치의 지폐를 지불하는 등 리라를 들고 다니기가 불편했다는 경험담을 털어놓곤 했다. 이탈리아는 서방선진 7개국(G7) 중 하나였지만 G7 중에서는 경제가 가장 취약했다.
원화 화폐 액면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잊을 만하면 다시 나오는 게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논란이다. '화폐단위 조정'이라는 뜻의 리디노미네이션은 한 나라에서 통용되는 통화를 실질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 가격을 동일한 비율로 낮추는 조치다.
1천 원을 1원, 혹은 10원으로 하는 식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을 한다면 현재 액면가에서 '0' 3개를 떼어내는, 즉 1천 원을 1원으로 변경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한국은행은 올해 국정감사 자료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한은은 리디노미네이션의 부작용으로 새 화폐에 적응해야 하는 국민 불편, 경제 주체의 심리적 불안, 화폐 교체 비용, 물가상승 가능성을 꼽았다.
이주열 한은총재는 지난해 국감에서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질문을 받자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있고 이에 공감한다"고 말했다가 한은이 화폐개혁을 검토 중인 것으로 해석돼 파문이 일자 "리디노미네이션을 하려면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한은은 정부가 2004년 리디노미네이션 논의를 유보한 후 관련 업무를 추진하지 않고 있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가장 최근에 리디노미네이션을 한 나라는 옛 소련 국가 벨라루스다. 벨라루스는 지난 7월 1일 0시를 기해 벨라루스 루블화의 액면 단위를 1만 대 1의 비율로 축소했다. 빅맥 2개 정도를 살 수 있는 기존 20만 루블권이 '0'이 4개 날아간 20루블 권으로 바뀌었다. 벨라루스는 거대 화폐단위로 인한 상품 거래와 회계 처리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억제하기 위해 리디노미네이션을 감행했다. 이 나라는 2011년만 해도 108%에 달하는 초인플레를 겪었다.
한국에서는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하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이미 리디노미네이션이 일어나고 있다. 젊은이들이 많이 이용하는 음식점이나 찻집, 옷 가게 등에서는 '스파게티 13.0' '아메리카노 4.0' '티셔츠 2.0' 등의 표시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찬성론자 들은 거래 편의성, 원화의 대외 위상 제고, 회계 처리 간편성 등을 들고 있다. 경제 규모가 커져 '경' 단위가 회계나 통계에 등장했다. 1경은 10,000,000,000,000,000으로, '0'이 16개다. 한국의 금융자산은 2010년 1경을 넘어섰고, 2015년 3월에는 1경 4천105조 원에 달했다.
리디노미네이션 반대 정서는 지하경제, 뇌물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화폐의 실질가치를 그대로 둔 채 액면 단위를 축소하면, 기존 화폐보다 실질가치가 큰 고액권이 등장하는데 지하경제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는 우려가 있다. '0' 3개를 떼어낼 경우 현재의 1천 원권은 1원이 되고, 5만 원권은 50원이 된다. 현재의 10만 원에 해당하는 100원권도 등장할 수 있다.
2009년 6월 5만 원권이 발행되고 나서 올해 7월 말 현재 5만 원권 발행잔액은 70조4천308억 원이다. 전체 화폐발행잔액 91조9천265억 원 중 5만 원권이 76.6%를 차지한다. 시중에 유통 중인 지폐 10장 중 약 3장이 오만원권이다. 그러나 오만원권은 환수율이 낮아 지하경제 유입 의심이 일고 있다.
'마늘밭'이나 금고, 장롱 속에 은닉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은이 공급한 화폐량과 한은에 환수된 화폐량을 비교한 환수율은 오만원권이 올해 상반기 50.7%에 불과해 만원권(111.2%), 오천원권(93.5%), 천 원권(94.7%)보다 매우 떨어진다.
우리나라 지하경제 규모는 추정하는 방식에 따라 예상치가 들쭉날쭉하다. 강경훈 동국대 교수는 국내총생산(GDP)의 30%로 추정하고, 이 규모가 너무 커 테러 자금으로 조달될 잠재적 위험이 있다고 분석했다. 2013년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교수는 한국의 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를 2010년 기준 24.7%로 추정했다.
김종희 전북대 교수는 지하경제 규모가 161조 원, 조세회피는 55조 원이라며, 이는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했다.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청탁금지법이 뇌물 근절, 투명사회에 대한 국민 여망 속에 닻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하면 리디노미네이션 가능성도 커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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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6
다시 불 붙은 '화폐개혁' 갑론을박
경제규모 맞지 않는 화폐단위…화폐개혁 해야 하지만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아
화폐개혁 가능성이 한차례 언급되자 국민들 사이에서도 찬반논란이 뜨겁게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전문가들은 경제규모에 비해 화폐단위가 지나치게 크다며 '필요한 개혁'이라는 의견을 보이고 있는 반면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화폐개혁은 지난달 한국은행에 대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화폐개혁 필요성이 거론되자 이주열 총재가 "필요성에 공감하고, 검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부터 이슈로 떠올랐다.
이 총재의 발언이 논란 되자 한국은행은 급하게 해명자료를 내고 "화폐개혁 추진 의사를 표명한 것이 절대 아니다"라고 한 발 물러섰지만 겉잡을 수 없이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한 눈에 보기 힘든 재무제표
이제는 해야 할 때 vs 일시적 효과일 뿐
화폐의 통화 단위를 바꾸는 것을 '화폐단위 변경' 또는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논의되고 있는 화폐개혁은 화폐단위를 낮추는 방향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업의 재무제표에는 숫자로 '1,000,000,000'를 쓰고 단위로 '천원'으로 표기해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숫자 표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위를 뒷단위를 정해 줄여쓰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 종사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에는 한 눈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뒷자리부터 '일, 십, 백, 천, 만...'과 같이 세는 사람들도 더러 존재한다.
이는 화폐 단위를 구분하는 ',(콤마)'가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는 단위를 맞추지 못한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영어의 경우 콤마를 기준으로 hundred(백), thousand(천), million(백만), billion(십억), trillion(조)와 같이 바뀌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1,000,000,000'은 새로운 단위가 아닌 '10억'이 되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들로 인해 단위축소 화폐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래도 '영(0)'이 줄어들면 인식하기가 그만큼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디플레이션과 소비·생산 부진이 우려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화폐단위 축소를 고려해 볼 만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1962년 화폐단위 변경 이후 지금까지 국민소득은 2000배, 물가는 50배 넘게 상승하는 등 경제규모가 커졌지만, 53년 전 단위를 사용하다 보니 거래단위가 너무 커서 불편도 적지 않다.
금융시장에서는 경(京)이라는 생소한 단위가 등장하고 레스토랑에서도 메뉴판에 '15,000원'이 아닌 '15.0'과 같이 표기하는 곳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거래가 불편해 원화의 국제화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주요 20개국(G20)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지만 OECD 회원국 34개국 중 34등으로 거의 유일하게 환율이 달러당 1000원을 넘는다.
이와 함께 일부에서는 1만원 제품이 100원에 판매되면 소비자들은 심리적으로 싸게 느껴 소비가 늘고 내수시장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으며, 화폐 교환을 위해 지하경제에 있던 돈들이 세상으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폐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화폐단위의 축소는 말 그대로 '단위'가 바뀌는 것이지 '가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소비는 주춤할 것이고, 금고에는 다시 새로운 화폐가 채워질 것이라고 반박한다. 화폐개혁으로 인한 내수 활성화는 그야말로 '일시적인 효과가 일어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화폐단위 축소에 수반되는 부작용으로 화폐단위가 낮아지면 수요가 늘어나 오히려 물가가 상승할 수 있고, 자동화폐교환기(ATM) 교체 등 비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화폐단위 축소나 변경이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뇌물 수수도 더 빈번히 일어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실제로 2003년 당시 한국은행은 박승 총재의 주도로 1000단위를 떼 선진국 화폐 단위 수준으로 조정하려는 화폐개혁이 추진됐지만 이같은 인플레이션과 사회적 혼란 등을 우려한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된 바 있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지금의 화폐단위가) 불편해서 바꾼다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 화폐가 없는 상태도 아니고 굳이 비용을 들여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바꾸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며 "경제사정을 고려했을때 지금은 (화폐개혁을) 할 시기가 아닌 것 같다"는 입장을 보였다.
반세기 넘게 동일한 단위 유지
해외 사례 교훈 삼아야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는 1962년 이후 한 차례도 화폐개혁이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화폐는 1914년 화폐단위가 일본의 은행권 단위인 '원(圓)'으로 통일됐다.
원(圓)은 광복 이후까지도 정식 은행권 단위로 사용됐고, 1953년 2월14일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화폐단위를 100대 1로 절하하고 '환(環)'으로 표시된 은행권을 발행하는 '1차 통화조치'를 시행했다. 이것이 한국의 첫 화폐개혁이다.
이후 1962년 6월 10일 정부가 '2차 통화조치'를 단행하면서 지금의 화폐단위인 '원'이 사용됨과 동시에 10환은 1원으로 절하한 것이 우리나라의 마지막 화폐개혁이다.
선진국의 경우 보통 자국 통화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할 목적으로 화폐개혁을 실시한다. 외국 화폐(외환)로 표시되는 자국 화폐 단위가 낮아지므로 인해 위상이 올라가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화폐개혁으로 실패한 국가들도 존재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이 그랬다.
우리나라가 2차례의 화폐개혁만을 진행한 것과 달리 북한은 지난 2009년 11월 30일 제5차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바꾸는 내용으로 높은 물가를 잡고 이른바 '시장 세력'을 제거해 후계체제의 조기 안정화를 꾀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시장 폐쇄, 외화사용 금지 등 뒤따른 조치에 유통이 경색되고 식량난이 가중되면서 주요 도시까지 아사자가 속출하고 민심이 악화하자 북한은 개혁의 총책임자인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 재정부장을 총살하기도 했다.
베트남 또한 2차례의 화폐개혁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전문가들은 베트남의 주 은행이 국영기업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언제 자신들이 저축한 돈이 국유화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행 이용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을 원인으로 분석했다.
반면 성공한 사례도 있다. 유로화는 1999년부터 부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화폐개혁이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 국가들은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자국 통화를 버리고 유로화를 채택하는 화폐개혁 과정을 거쳤다.
화폐를 통합해서 회원국의 투자확대, 거래비용 감소 등으로 효율성이 증대되면서 지금 유로화는 달러화에 이어 국제거래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결제통화가 됐다.
이러한 사례를 보듯 화폐개혁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문제점 또한 뚜렷하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미룰 수도 없는 과제이기도 하다. '일회성'에 그칠 효과에 운운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효과를 볼 수 있는 방안으로 조심스럽고 또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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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웬 리디노미네이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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