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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평택이야기

경부선 110년 평택역 110년, 평택을 변화시키다

by SL. 2015. 12. 29.

2015.12.23  

 

평택역 개통, 진위군청 소재지 진위 봉남리는 ‘낙후’ 평택은 신흥 도시로 ‘발전’
평택은 일제강점기 쌀의 생산지·집산지로 유명, 평택역은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
평택역 유동인구·물동량 크게 늘어나면서 사건사고 잦아, 평택인의 생활상 대변

 

올해는 경부선이 개통된 지 110년이 되는 해였다.


유럽과 일본 등 대다수 나라들의 철도 부설은 근대의 상징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침략성’이라는 제국주의 산물이기도 하다. 철도가 처음으로 부설된 것은 1899년 경인선으로 인천에서 노량진까지였다. 철도는 자력으로 부설하고자 했으나 자금이 부족했던 당시 대한제국은 미국과 일본 등 제국주의 자본으로 부설하면서 침략의 제물이 됐다. 경인선은 미국이 부설권을 확보했으나 일본에 넘겨져 개통됐다.


경인선에 이어 두 번째로 부설된 경부선은 1898년 9월 일본이 부설권을 확보했다. 일본은 1901년 6월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경부선 부설을 본격화했다. 이해 8월 21일에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착공식을 거행했다.

 

당시 자금이 부족했던 일본은 “경부선은 조선에서 일본의 유일 맥관脈管이자 사활의 기관”이라고 황족·부호에서 시골 농부들까지 주식을 사서 애국하라고 선동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수물자 수송 등 군사적 목적을 위해 보다 빨리 공사를 진행해 1904년 12월 27일에 완공했고, 이듬해 1905년에 전체 선로를 개통했다. 이 시기 평택역도 경부선 부설과 함께 1905년 개설돼 올해로 평택역 개통 110년을 맞았다.

 

 

 

 
 

 

당초 경부선 노선에 평택역 계획 없어
세 차례 답사 마친 후 평택 노선 결정

경부선을 부설 초기에는 평택을 지나는 노선이 아니었다. 첫 노선 계획은 서울~용인~죽산~안성~청주~문의~상주~대구~삼랑진~부산이었지만 3차 답사에서 서울~노량진~영등포~수원~진위~둔포~전의~공주로 이어지는 노선을 결정함에 따라 진위 즉 평택에 경부선이 부설됐고, 평택역도 들어서게 됐다. 그렇다면 평택 노선이 선정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바로 미곡, 즉 쌀의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평택은 일제강점기에 쌀의 생산지뿐만 아니라 쌀의 집산지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평택을 일컬어 ‘중부 조선 최대의 쌀 생산지이며 집산지’라고 했다.


경부선 부설 진척에 따라 적지 않은 사유지가 수용됐고, 보상비가 지급되었는데, 평택지역 일대는 논 상품 30전, 중품 21전, 하품 17전, 밭 상품 12전, 중품 8전, 하품 4전의 보상비가 책정됐다. 이 보상비는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보다 많게는 10전, 적게는 5전씩 적은 액수였다. 서정리역과 평택역을 지나는 경부선 철도 평택지역은 논·밭 13만 9570평이 수용됐으며, 보상예정 총액 2만 679원 79전에 땅 소유주는 730명에 달했다. 그러나 철도수용 부지 보상은 1907년에 이르러서야 지불됐는데, 진위역은 1만 1626원 90전, 서정리역은 3386원 3전이었다.


그렇지만 철도 부설이 일본의 침략성에 기인했다고 인식한 의병들은 철도공사 현장이나 철도역을 습격하기도 했다. 의병의 철도 현장 습격은 전국적으로 발생했는데, 평택지역에서는 1907년 9월 10일 병점역에서 30리 떨어진 선장동에 의병 700여 명이 집결해 오산역과 진위역을 습격했다. 이때 진위역에는 일본군 탐정대가 상주했는데, 의병들은 일본군의 총격으로 역 뒷산으로 피신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초기에는 진위역이 있었지만 개설되지는 못했다.


평택을 지나는 경부선이 부설되기 전까지는 평택의 중심은 진위, 그것도 봉남리였다. 당시 봉남리는 진위군 소재지로서 평택지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은 철도역을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됐다.

 

남대문역에서 시작(실제적으로 경부선의 시작은 부산 초량역이었다)된 경부선은 영등포~수원~오산~서정리~평택으로 이어지면서, 기존의 진위 일대는 철도역세권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에 따라 진위 일대는 점차 쇠퇴할 수밖에 없었으며대신 평택역 일대가 새로운 신도시로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평택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사회 형성
역 주변에 관공서와 공공기관 들어서

지금의 원평동 일원에 평택역이 설치되자 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원역의 경우도 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는가 하면 허허벌판이었던 대전도 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우선 역을 중심으로 도로망이 조성됐는데, 평택역을 중심으로 동편의 서북쪽으로는 1등 도로인 1번 국도가 지나갔고, 남서쪽으로도 새로운 도로 즉 신작로가 개통됐다. 이처럼 평택역 일대에 사통팔달 도로망이 형성되면서 도시가 급격하게 발전했다. 평택역 남쪽에는 ‘혼마치’라고 불리는 본정통本町通이 새로 형성됐다. 그리고 지금의 원평동 일대에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지만 평택역 개통 7년째인 1912년 평택역의 물동량을 보면 당시 평택역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평택역을 이용한 승객의 경우 승차 인원은 1만 4904명, 하차 인원은 1만 5210명이었으며, 객차 수입은 1만 5260원이었다. 발송한 화물량은 1만 3932톤, 도착된 화물수량은 2186톤이었으며, 화물운송 수입은 3만 7062원으로 평택역의 총 수입은 5만 2322원이었다.

 

그리고 평택역을 이용한 주요 화물은 발송의 경우 쌀 8316톤, 보리 112톤, 콩 1428톤, 잡곡 46톤, 소가죽 12톤, 건어물 62톤, 소금 3377톤으로 이들 화물은 평택은 물론 경기도의 화성, 충청남도의 당진, 면천, 서산, 태안 지방에서 생산한 것들이었다. 도착된 화물의 경우 쌀 153톤, 보리 60톤, 생과일 12톤, 채소 17톤, 담배 27톤, 신탄 25톤, 가마니 79톤, 신선한 생선 30톤, 건어물 79톤, 명태 100톤, 해초 31톤, 금속기 35톤, 가구 59톤, 술 26톤, 설탕 11톤, 식료품 35톤, 면제품 중에 품질이 고급인 금건金巾 149톤, 면포 20톤, 연촌憐寸 24톤, 도자기 14톤, 기와 44톤, 석재 74톤, 석유 171톤, 목재 217톤 등이었다. 한편 평택역의 승하차 여객 수는 1910년은 전국적으로 24위, 1920년에는 23위, 1930년에는 44위, 1937년에는 39위였다. 이로 볼 때 평택역을 이용하는 승객 수는 전체 철도역 가운데 상위권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경부선이 개통되고 평택역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지배정책은 ‘동화同化’였고, 내선융화內鮮融和라는 틀을 통해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내지시찰內地視察 즉 일본시찰을 추진했다. 평택에서는 평택역을 출발해 김천~대구~부산을 거쳐 일본 규슈의 오이타大分, 오사카大阪, 도쿄東京 일대를 시찰했다. 근대 문화시설을 위한 시찰은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진행됐다. 서울과 인천 등지를 시찰했는데, 이 역시 평택역이 시발역이었고 종착역이었다. 

   
 

 

평택역, 평택사람의 관광 시발역이자 종착역
열차사고와 안타까운 인명사고도 많아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가장 가고 싶은 관광지 가운데 하나가 금강산金剛山이었다. 금강산 관광은 지금은 남북의 분단으로 불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체를 조직해 관광을 다녀왔다. 평택역에서도 ‘금강산탐승단金剛山探勝團’을 모집해 평택역을 출발하여 원산을 거쳐 금강산을 관광했다.


이처럼 시찰과 관광 외에도 평택역은 탈선과 각종 사고가 적지 않았다. 1935년 4월 11일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하던 급행열차가 평택역으로 진입하다가 식당차와 침대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12살 어린이의 장난으로 열차가 전복하는 사고가 났지만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 2년 후인 1936년 1월 7일 오후 2시 부산을 출발해 만주 신경으로 향하던 히까리光열차가 평택역과 서정리역 사이에서 화물자동차와 충돌해 탈선한 적도 있었다. 기관차가 많이 파손돼 40여 분 연착할 수밖에 없었다. 1940년 2월 11일 오후 6시경에도 만주 봉천으로 향하던 열차가 평택역으로 들어오다 신호를 제대로 보지 못해 구내의 화물차와 충돌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처럼 기차의 충돌 외에도 인명사고도 적지 않았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연도 없지 않았다. 1926년 11월 18일 오후 3시 40분경 제천으로 출가한 노모가 장호원 사는 딸을 데리고 친정을 찾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통복리 사는 박순문은 노량진에 사는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서 갔다가 1927년 6월 30일 오후 11시 55분 평택역에 도착하는 남행 급행열차를 타고 오던 중 평택역에 도착하기 전에 뛰어내리다가 치여서 중상을 당했으나 결국 절명하고 말았다. 1931년 3월 23일 오전 3시 서정리역에서 평택역으로 향하는 제46열차 남행 열차가 평택역으로 들어올 때 통복리 사는 김기성(21)이라는 청년이 자살한 사례도 있다. 그 사연인 즉 3년 전부터 일본인 여관에 고용살이를 했지만 생활고로 세상을 비관하다가 열차에 뛰어들어 젊은 삶을 마친 것이다. 이외에도 나이 많은 노인이 철로로 소를 몰고 지나가다가 사고가나서 희생되기도 했다.


평택역이 생기면서 평택역 주변은 관공서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사회단체 사무실이 모여들고, 일본인 사회가 형성되면서 평택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다보니 평택역 주변에 화재가 적지 않게 발행했다. 1934년 4월 21일 새벽 1시 30분 대규모 화재가 발생했다. 이 불은 10시간 동안이나 계속돼 건물 11호가 완전히 타버리는 등 적지 않은 사회적 손실이 발생한 대형 화재였다.


평택역은 물동량 증가와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여러 차례 증축됐다. 1940년 2월 11일 경부선 복선공사가 절반 정도 진척되자 기존의 평택역보다 세배나 큰 역사를 확장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당시 평택역 왼쪽에 있던 농업창고, 조선질소 비료창고, 진안자동차회사 건물 등이 포함됐는데, 이는 수원과 천안 사이에 가장 큰 역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한편 천안과 안성을 잇는 철도를 부설한다는 소식을 들은 평택주민들은 시민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는 그동안 안성과 장호원 등 물자들이 평택역을 이용했는데, 이를 안성과 천안을 잇는 철도가 생기면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그 대안으로 평택과 안성을 잇는 도로 확장을 제시하기도 했다.
철도는 이제 단순한 교통의 수단을 넘어 사회, 경제, 나아가 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10년 전 경부선의 부설과 평택역이 들어서면서 평택은 근대도시로서 새로운 변모를 꾀했다. 경부선 평택역 개통 110년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평택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글 성주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사진자료 박성복/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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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육군 특별기원병 전국적으로 모집, 평택에서도 다수 지원해 평택역에서 출발
평택을 빼앗기면 금강이북에서 저지선 형성 못해, 성동초교서 육군 1군단 창설
평택역 오폭으로 탄약·폭탄 폭발, 국군 17연대장 백인엽 부상·국군 200여 명 사상

 

8.15해방,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평택역을 통해 다시 평택으로 돌아와

 

 


평택의 변화와 발전은 지난 호에서 살펴봤듯이 평택역이 그 중심에 있었다. 평택역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5년 설치되는 그 순간부터 평택사람들의 삶이었다. 평택역은 평택을 떠나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이 교차하는 시공간이었고, 애환이 묻어나는 그런 곳이었다.


평택역이 설치된 이후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평택의 중심지는 진위에서 지금의 원평동 일대로 이동되었다. 평택군청을 비롯해 각종 관공서와 공공기관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신작로가 확장되면서 점차 번화가로 발전했다. 바로 오늘날의 신도시였다. 이처럼 평택역은 평택을 변화시켰지만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각종 사건·사고와 함께 일제 침략의 전진기지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 말기 물적 인적 수탈의 상징은 바로 평택역이었다. 일제 말기 평택역의 슬픈 사건을 하나 살펴보자.


1940년 7월 31일 오후 1시경이었다. 대전에서 출발하여 서울로 가는 열차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제는 1938년부터 전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를 실시했다. 당시 육군 특별기원병 지원의 조선인 경쟁률은 50대1이었다. 지원병은 전국적으로 모집했는데, 평택에서도 적지 않게 지원병에 지원했다.


1940년 7월 평택에서 지원병으로 입소가 결정된 이한규라는 젊은이는 환송을 위해 만세소리가 가득 찬 평택역에서 떠나는 기차에서 깃대를 흔들다가 신호기에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한규는 열차에서 떨어져 왼쪽 이마와 오른쪽 팔에 타박상을 입었다. 이한규는 결국 지원병으로 열차에 몸을 싣지 못하게 됐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처럼 평택역은 일제 침략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 아픈 평택역인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새로운 모습으로 전환되었다. 일제의 패망과 해방으로 평택역은 평택을 떠났던 사람이 돌아오면서 새롭게 활기를 띄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기도 1946년 수해로 위기를 맞았다. 이해 6월 말일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장마와 폭우로 수해이재민만 4만여 명 이상 발생했다.


평택도 수해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는데, 평택 전역이 물에 잠겨버렸다. 특히 평택역과 주변 일대는 저지대로 최근까지도 장마 때면 종종 잠기곤 했는데, 당시에도 이 일대는 완전히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안성천이 범람하면서 80여 명의 인명 피해와 222만 3100평의 경작지가 유실되었다. 그 속에서도 평택역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면서 평택사람들의 애환을 지켜보아왔다. 

 

 

 

 

▲ 한국전쟁 당시 UN군의 평택역 오폭사건, 폐허가 된 평택역(1950년 7월 6일)

 

 

북한군 남하로 평택-안성 방어선 구축
미군 제34연대 제1대대 평택에서 진지

환호성과 곡성으로 가득했던 평택역은 한국전쟁으로 전환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은 평택역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말았다. 6월 25일, 38선을 넘은 북한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장악하고 3일을 머물다가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 길목이 평택이었다. 평택과 안성을 잇는 방어선은 평택의 입구에 해당하는 오산과 평택 일대에서 대규모의 전투가 전개됐고, 평택역 폭격으로 이어졌다.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머물던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남하하자 유엔군은 북한의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필요한 원조를 남한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유엔의 방침에 따라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미 8군 워커 사령관에게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보병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 이 작전 명령에 따라 7월 1일 새벽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선발대로 이날 낮에 이타주케板付 공군기지에서 부산으로 공수됐다.


스미스 부대는 7월 4일 오산 부근에서 북한군을 저지할 태세를 갖추었다. 사단장 딘 소장은 스미스 특수부대를 오산부근에 투입할 당시 북한군의 전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스미스 부대가 오산 북쪽에서 북한군을 방어하여 시간을 얻게 된다면 제 34연대를 평택과 안성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7월 4일 오후, 미군 제34연대 1대대가 선발대로 먼저 대전에 도착했다. 딘 사단장은 우선 이 대대를 평택 부근에 급파해 스미스 부대를 엄호토록 응급조치를 했다. 7월 5 일 새벽 제3대대와 연대본부가 평택 인근에 도착하자 첫째 한강을 도하하여 기갑부대와 함께 수원 부근에서 남하 중 인 북한군은 스미스 부대가 오산 부근에서 방어할 것. 둘째 제1대대는 평택 부근에서 진지를 점령할 것, 셋째 제3대대는 안성을 확보할 것, 넷째 연대 지휘소는 성환에 둘 것 등의 긴급명령을 내렸다. 

 

 

 

 

 
▲ 한국전쟁 당시 UN군의 평택역 오폭 장면(1950년 7월 6일)

 

 

 

성동초등학교에서 육군 1군단 창설
미 스미스부대 오산 죽미령에서 패해

그렇다면 왜 평택과 안성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을까 하는 점이다. 평택은 금강 이북 지역에서 국도의 방어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는 것과 서쪽 경기만으로 이어지는 안성천이 자연스럽게 평택의 서쪽을 방어하는 형세이고, 또 동쪽은 남북을 종단하는 도로가 빈약해 북한군의 공격이 오산과 평택을 잇는 도로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북한군이 우회하는 도로가 없기 때문에 경부선을 따라 내려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평택은 미군의 입장에서는 북한군을 저지할 최적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평택을 북한군에 빼앗긴다면 금강 이북 지역에서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러브리스 연대장은 7월 5일 낮에 연대본부를 성환에 설치했으며, 이날 평택성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육군 1군단을 창설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는 날씨가 매우 불량했다. 비가 내리는 한편 안개가 낮게 내려앉기도 했다. 이로 인해 평택과 성환·안성 등으로 이어지는 무선 교신이 제대로 이뤄 지지 않았고. 유선마저도 피난민에 의해 노끈 대용으로 잘려져 나가는 사례가 빈번했다. 무선과 유선이 불통되는 상황에서 연대장의 지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날 오산 죽미령에서는 스미스 부대가 북한군과 처음으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참패했다. 이날 새벽 5시 제1대대는 신임 대대장 에이리스 중령의 지휘 아래 평택으로 진출했다. 이어 평택읍의 북쪽 국도변 한 민가에 지휘소를 개설하고 그 인근에 1개 중대를 배치하는 한편, 2개 중대를 4㎞ 북쪽으로 진출시켜 도로의 동쪽 칠괴리 부근에 배치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산에서 포병사령관 대리 바스 준장이 평택에 도착했다. 바스 준장은 스미스 부대의 전투 상황을 전하면서 곧 북한군의 전차가 들이닥칠 것이니 제대로 정찰하는 한편 로켓포를 배치해 대비하도록 하였다.


오산 죽미령에서 패한 스미스 부대는 오후 4시 반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북한군의 전차가 오산을 지나 국도를 따라 남하하자 스미스 부대는 안성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이날 오후 집결하였고 이곳에서 제3대대와 합세했다.

 

그런데 스미스 부대의 철수과정을 제 대로 전달받지 못한 평택의 제1대대와 성환의 연대본부는 북한군의 남진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7월 6일 들어 제34연대는 평택-안성 방어선을 포기하고 천안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유엔군 오폭으로 평택역 잿더미
평택역 복구 시 출입구 동쪽으로 변경


평택에 남아있던 제1대대는 7월 6일 오전 9시 지휘소를 성환으로 이전하는 한편 지원 중인 한국 공군 교량폭파조로 하여금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선 부대가 평택을 떠나는 즉시 평택의 북쪽 통복천 교량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유엔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평택역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폭격 명령이 떨어진 다음 날인 7월 7일 오스트레일리아 소속의 B26편대가 평택 상공에 나타났다. 일단 유엔군 비행기가 나타나자 평택 시민들은 거리에 나가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유엔군 비행기가 북한군을 폭격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엔군 비행기는 북한군을 폭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길목을 폭격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었다. 평택역과 통복동 일대 상공을 몇 바퀴 돌다가 갑자기 평택역 철로를 비롯해 당시 평택의 중심지였던 원평동과 평택동·비전동 일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유엔군의 폭격으로 철로는 끊어졌고, 평택역은 잿더미로 변하였다.

 

 <한국전쟁사1>에 의하면 당시 평택역에서 하차를 기다리던 탄약과 폭탄도 함께 폭발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국군 17연대장 백인엽이 부상당한 것을 비롯해 200여 명의 같은 연대 국군도 함께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미군의 폭격으로 끊겼던 철로는 이해 10월 9일 성환에서 평택, 10일에는 평택에서 서정리 사이를 복구했고 군수물자를 수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게 변한 것은 폐허화된 평택역이었다. 그동안 출입구가 원평동 쪽이었던 평택역이 지금의 동쪽으로 변경돼 새로운 역사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됐다.

 

글 성주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사진자료 박성복/평택시사신문 사장

< 저작권자 © 평택시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http://www.ptsisa.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57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평택역과 경부선 철로는 점차 전쟁의 상흔을 씻어내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서울과 부산, 서울과 목포, 서울과 여수 등 각 노선을 달리던 열차는 평택을 지나면서 평택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전후 복구에도 평택역은 적지 않게 기여했다. 오늘날과 같은 평택역의 모습은 한국전쟁 이후 새롭게 꽃단장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주요 관공서를 비롯한 행정기관과 공공기관들이 평택역을 바라보고 자리 잡게 됐다.


평택역은 평택을 변화시키고 희망을 줬지만, 평택역을 지나는 열차, 그리고 서울과 부산을 잇는 평택지역의 철로에는 여전히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열차의 탈선, 소매치기 발생, 역사轢死 등등. 평택지역에서 해방 후 1970년대까지 열차와 철로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는 대략 23건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사건사고는 이 시기에 발행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에서 실린 것인데, 이외에도 더 많은 사건사고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택지역 열차 관련 사건사고는 1950년대 2번, 1960년대 14번, 그리고 1970년대 7번 정도 발생했다.


한국전쟁 이후 첫 사건사고는 달리는 열차에서 화재가 난 사고였다. 1958년 2월 25일 오후 2시 25분경 평택역과 서정리역 사이를 달리던 제204 여객열차 9량 중 네 번째 객차에서 승객이 버린 담뱃불이 천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인화돼 승객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차창 유리 70여 매가 파손됐고, 차에서 뛰어내리던 승객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204열차는 33분이나 멈췄다가 다시 서울로 향했다.

 

 

 

 

 
▲ 평택 서정리역사 전경(1960년대)

 

 

 

화재와 탈선사고로 평택역 수난
소매치기 일당 15명, 잡고 보니 헌병

열차 화재사고는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1970년에도 발생했다. 이해 5월 19일 새벽 1시 45분경 나주에서 출발해 서울로 가던 제1012호 화물열차에서 불이나 운반 중이던 메타놀유 234드럼과 화차가 모두 타버렸다.

 

당시 불은 세 시간 동안이나 계속돼 평택역 일대가 위험할 정도였다. 그리고 오전 10시경에는 철로 곁에 내려놓았던 25드럼에 다시 불이 다시 붙어 철로 30미터가 튕겨나가 하루 종일 경부선이 불통되었다. 화재의 원인은 낡은 바퀴에서 열이나 일어난 불꽃 때문이었다.


열차 사고 중 대형 사고는 무엇보다도 열차의 탈선이었다. 당시 평택지역에서 발생한 열차 탈선사고는 네 번 있었다. 1962년 4월 21일 오후 평택역 부근에서 탈선사고가 나는 바람에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으로 가던 통일호 제4열차가 제시간보다 2시간 36분이나 연착했다.

 

이로 인해 부산역에서는 승객 266명에게 급행료 39만 185환을 상환하는 소동이 있었다. 1967년 3월 27일에는 경부선 평택과 성환을 잇는 황담교 근처에서 부산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군용열차 12량 중 5량의 객차가 탈선 전복됐다. 이 사고로 인해 군인 13명이 부상당했다. 1969년 1월 31일에도 탈선사고가 있었는데, 이날 오후 5시 20분경 서울로 가던 열차 태극호의 객차 1량이 탈선했다. 이 사고로 객차 안 마루 바닥이 튀어 올라 승객의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다치는 타박상을 입었다. 탈선사고에 비해 피해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잦았던 탈선사고는 1970년대는 한 번밖에 발생하지 않았다. 1973년 3월 29일 오후 7시경 평택역 구내에서 입환작업을 하던 두량의 화물열차가 탈선했다. 이로 인해 평택역을 지나는 18개 여객열차와 3개 화물열차의 발을 1시간 30분에서 4시간 동안 묶어 놓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문제가 된 것은 통행금지로 인한 사후조치였다. 지금은 통행금지가 없어진지 오래돼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1973년 당시에는 밤 12시면 통행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 때문에 12시가 넘어서 서울역에 도착한 승객들은 역 주변의 여관에서 자거나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청할 수박에 없었다.


지금은 ‘소매치기’라는 말도 거의 사라진 듯하다. 그렇지만 한국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매치기가 적지 않았다. 소매치기는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는 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발생했다. 이외에도 승객이 많은 열차에서도 종종 일어났다. 1950년대 후반 당시만 해도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1958년 4월 12일 군 병장 소매치기가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군 병장은 이날 새벽 3시경 서울행 34열차가 천안을 지나 평택으로 달리는 와중에 한 승객의 호주머니에서 6만환을 훔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붙잡힌 군 병장은 군수사기관인 헌병에 속했다는 점이다. 군 병장이 속한 소매치기단은 대전과 서울간, 대전과 부산간, 대전과 목포간을 운행하는 열차에서 승객의 호주머니를 털었는데, 15명이 한패였다.


 

 

 

 
▲ 경부선 송탄부근 풍경(1960년대)
   

 

 
 

 

소매치기·폭력·투신, 얼룩진 사건 줄이어
관할권 두고 평택署와 천안署 핑퐁게임

열차 소매치기범은 경찰에 의해 점차 소탕됐지만, 경찰서가 서로 관할권 때문에 논란이 된 적도 있었다. 바로 평택역 근처에서 붙잡힌 소매치기범이 주인공이었다. 이 소매치기범은 함께 술을 먹던 승객이 잠들자 그의 호주머니에서 10만원을 훔쳤다. 소매치기 당한 것은 평택을 지날 무렵 알게 됐다.

 

신고를 받은 수원경찰서는 소매치범을 평택경찰서로 이첩했으나 평택경찰서는 자신의 관할구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도난신고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소매치기범을 처음 신고한 수원경찰서로 돌려보냈다. 이에 수원경찰서는 소매치기범을 천안경찰서로 넘기고자 했으나 천안경찰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조치원경찰서까지 핑퐁게임에 참여했으나 결국 수원경찰서에서 마무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관할구역 다툼은 여전했다. 이외에도 평택역을 지나는 열차에는 폭행사건 등이 발생해 사회적으로 적지 않는 문제를 일으키곤 하였다.

 
철도의 부설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편리하기 때문에 이로운 것은 아니다. 철도로 인해 적지 않은 생명이 희생됐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1962년 5월 13일 오전 8시경 송탄 지산리 적봉신호장 남쪽에 30세 정도 되는 신원미상의 여인이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1963년 11월 6일 밤 10시 반경 실종된 한 여성이 다음날 오전 6시 20분경 세교리 은실마을 앞 건널목 남쪽 철로에서 열차에 치여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연인즉 이 여성을 1년 전부터 짝사랑한 한 남자가 괴롭히자 이를 비관하고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어 재수사를 했지만 그 후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보다 슬픈 사연은 1965년 11월 23일 발생했다. 27일 된 두 아이의 어머니가 생활고를 비관하고 서울서 부산으로 향하던 열차가 평택역을 지나자 자신의 두 아들을 차창 밖으로 내던졌다. 이로 인해 두 아들은 목숨을 잃었고, 비정의 어머니는 함께 죽게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수했다. 1966년 4월 24일에는 서정리역 부근에서 서울로 향하던 열차에 치이는 찰나 자식을 구하고 희생한 어머니도 있었다.


어린아이도 열차에 희생되는 사고도 있었다. 1968년 9월 26일 오후 4시 12분경 진위면 신리 피일천 철교에서 11살, 9살, 7살 3남매가 철교를 건너다가 달려오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 평택역 앞 기념촬영(1971년)

 

 

여행은 즐겁게, 잡상인을 없애라
당국의 친절하고 현명한 대책 촉구

지금이 열차는 잡상인이 없지만 1970년대 열차에는 잡상인 많았다.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하고 때로는 불쾌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평택읍에 사는 이영호라는 상인은 “열차의 잡상인을 없애라”는 기고를 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차여행은 즐겁다. 경쾌하게 달리는 바퀴소리를 들으며 산과 들을 내다보노라면 여행의 즐거움으로 흐뭇해진다. 그런데 난데없이 ‘장거리 여행을 하는 승객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잡상들의 목쉰 소리가 여행의 즐거움을 구겨놓고 만다. 발을 들여 놓기 힘들 정도의 혼잡한 차중에서 잡상들이 떠들어대는 각종 성품선전을 참기란 고역이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사뭇 ‘고행’이다.

 

최근 당국이 편안하고 명랑한 여행을 위한 시설의 확충과 개선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흔적이 엿보이나 ‘5·16’ 이후 자취를 감췄던 이들 소매치기·잡상·걸인패들이 다시 설치기 시작하여 여행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혼잡한 차중에서 그런대로 아득한 여행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당국의 친절하고도 현명한 대책이 아쉽다”


경부선이 부설된 지 110년, 그리고 평택역과 서정리역이 설치된 지도 110년이 됐다. 철로는 늘 마주하고 있다. 110년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다. 그 속에는 다양한 평택의 모습과 평택인의 삶을 변화시켰다. 이번호에는 해방 이후 1970년대를 중심으로 평택역과 평택 관내에서 일어난 사건사고를 정리해봤다. 다음호에는 1980년대 이후 철도를 통해 변화된 평택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다음호 계속)

 

글 성주현/청암대학교 연구교수
사진자료 박성복/평택시사신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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