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40년 살아가는 법]
사교육비에 발목잡힌 은퇴 준비… 절반만 줄여도 노후가 따뜻
자녀에게 올인하지 마라
어릴 때 학원보내는 부모보다 늙어 손 벌리지 않는 삶을
자녀가 노후 보장 해준다는 건 100세 시대엔 어리석은 생각
수입의 절반가량이 사교육비… 학생 1인당 평균 월 24만원
반으로 줄여 연금으로 돌리면 은퇴 후 월 25만원씩 받게 돼
대기업 차장 홍모(43)씨는 1년 전 아내와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뉴질랜드에 보냈다. 어렸을 때 영어를 잘 배워놓지 않으면 원어민 영어를 구사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기러기 아빠'를 자처했다.
월급 500만원 중 300만원은 뉴질랜드로 송금한다. 전(前)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 1200만원도 딸의 1년 학비에 털어 넣었다.
그의 생활비는 아파트 관리비와 식비 등 모두 합쳐 100만원. 남은 월급 100만원 중 50만원은 보험료로 나간다. 남은 50만원을 개인연금과 펀드에 넣는 것이 노후 준비의 전부다.
그나마 개인연금을 부을 수 있는 건 그에게 대출이 없어서다. 그는 빚내서 집 사는 대신 인천 92㎡(28평) 아파트를 전세 9000만원에 세들어 살고 있다.
◇100세 시대엔 '자식 교육=든든한 노후' 공식 안 통해
그는 앞으로도 1년간 이 생활을 하기로 했다. 그의 총 2년간의 기러기 아빠 생활을 기회비용으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총 4800만원이란 계산이 나온다. 2년간 학비로 2400만원이 들어가고, 월 150만원이던 저축이 50만원으로 100만원 줄어든 게 2년치면 2400만원이기 때문이다.
이 4800만원을 노후 연금(年金)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까. 이 돈을 쪼개 국민연금 한 달 납입최고액(33만7500원)씩 매달 넣는다면 12년을 넣을 수 있고, 그렇게 하면 홍씨가 65세가 된 후 죽을 때까지 월 38만원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기러기 생활 2년이 월 38만원 노후 연금과 맞먹는다는 뜻이다. 홍씨는 "애한테 투자하는 게 노후 대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씨처럼 아이에게 투자하는 것이 곧 은퇴 준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강창희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장은 "100세 시대에 자녀들이 노후를 보장해 줄 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 딸과 아내를 뉴질랜드에 보내 놓은 ‘기러기 아빠’ 홍모씨가 스마트폰에 저장된 딸의 사진을 보고 있다. 홍씨가 딸을 2년간 유학 보내지 않는다면 노후에 국민연금을 월 38만원씩 더 받을 수 있다.
은퇴 후 많으면 100세까지, 최고 45년 동안을 소득 없이 살 수도 있는데, 그 오랜 기간 동안 자녀들이 늙은 부모를 부양해 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20년 전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는 나이는 평균 26세였다. 앞으로 40년 뒤, 환갑이 되는 큰 자녀가 86세 부모를 부양할 수 있을까.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어릴 때 국영수 한 과목 과외시켜 주는 부모보다 늙어서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는 부모가 자식에게 훨씬 더 좋은 부모라는 식으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교육비 절반 줄이면 월 25만원 연금 받을 수 있다
자녀 사(私)교육에 은퇴 준비를 저당잡히는 것은 홍씨 같은 기러기 아빠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 부모들의 보편적인 문제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은행원 김모(45)씨가 올해 5학년·2학년에 올라가는 딸 2명에게 한 달에 쏟아붓는 학원비는 월 180만원이다. 큰딸은 영어·수학·피아노·미술·논술·학습지 2개(총 120만원), 작은딸은 영어·미술·태권도·학습지 1개(60만원)를 한다.
두 딸은 사립초등학교 학비로도 1년에 800만원씩 낸다. 1년 교육비로만 3760만원이 드는 셈이다. 연봉 9000만원 중 42%가 들어간다.
그의 노후 준비는 월 70만원씩 개인연금신탁을 드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마이너스 통장 빚이 1000만원 늘었다"며 "따지고 보면 교육비에 '몰빵'하고 노후 준비는 빚내서 한 셈"이라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 1인당 평균 사교육비는 월 24만원(2010년 기준)이다. 만약 아이 한 명의 초·중·고 사교육비를 반으로 줄이면 국민연금 최소가입액(8만9100원)을 16년 정도 납입할 수 있고(총 1728만원), 노후에 매달 25만원 정도씩을 손에 쥘 수 있게 된다
은퇴 후 집에서 TV만 볼건가?… '시간 디자인'을 하라
20만 시간 관리계획 짜자은퇴하면 시간 빨리 안 가, 공황 상태에 빠지기 쉬워퇴직 후 6개월 시간 관리가 나머지 은퇴 기간을 좌우… 시간 관리 못해 조바심에 대책없이 자영업 뛰어들기도
"퇴직 첫날, 부인이 차려주는 밥을 세 숟갈 급하게 떠먹은 뒤 평소처럼 바쁘게 지하철을 타고 회사 앞까지 아무 생각없이 갔어요. 회사 앞에 가서야 '아, 일 그만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시 집으로 와 보니 집은 텅 비어 있고, TV 보고 책 읽다가 잠들었어요."금융관련 협회에서 일하다 1년 반 전 정년 퇴직한 최모(57)씨가 회상하는 퇴직 첫날 모습이다.
"둘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자동반사적으로 집을 나와 2시간 정도 산책했습니다. 오후에도 다시 나가 집 주변 철길을 내내 걸어다녔어요. 넷째날은 월요일이었는데 그날도 양복 입고 회사 앞까지 갔다 왔어요. 회사 앞에 가서야 '이러면 안 되는데, 난 은퇴했는데'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더군요. 집에 와 난초 50개를 꼼꼼히 돌보며 2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날부턴 아침에 회사에 가지 않았어요. 대신 자식들 학교 가는 것 배웅하고, 케이블TV에서 경제프로그램을 보다가 라면도 끓여 먹고…."퇴직 후 1년 반이 지났지만 그의 생활 패턴은 여전하다. 책 보고, TV 보고, 인터넷 하고, 난초에 물 주고, 강아지 밥을 주며 보낸다.평생 회사에 매여 있던 사람이 은퇴를 하게 되면 남는 시간이 주체할 수 없이 많아진다.
강창희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장은 "은퇴 후 시간은 회사 다닐 때보다 더 느리게 가는 경향이 있다"며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미리 따져 보지 않으면 은퇴 직후 공황 상태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퇴직 후 1주일을 연상해 보라평생을 24시간이라고 가정해 보자. 남성 평균 수명이 63세이던 30년 전의 경우 55세에 은퇴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시계에 비유하자면 '오후 8시'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씻고 TV 조금 보다가 잠들면 적당한 시간이다. 하지만 평균 수명이 77세로 늘어난 요즘은 '오후 5시'에 은퇴하는 셈이다. 그만큼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부터 TV 채널만 돌리며 시간을 보내기엔 너무 길고 아깝다.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앞으로 은퇴하는 사람들은 은퇴 후 시간을 관리하는 방식을 아버지 은퇴 세대와 완전히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의 은퇴 세대에게는 은퇴 후 남는 시간의 절대량이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 적어도 3배 늘었기 때문이다.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은퇴 직후 6개월 동안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머지 은퇴 기간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가 준비 없이 닥치면 조바심만 가지고 시간을 보내기 쉽다"며 "많은 은퇴자들이 대책 없이 자영업에 뛰어드는 것도 자신이 남아도는 시간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은퇴후 시간표 3개 만들어 실천"신정모(70)씨는 은퇴 후 시간을 잘 관리해 쓰는 모범 케이스이다. 그는 2002년 전주 중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세 개의 기간으로 나눠 관리했다고 한다.1기는 교직에 몸담았던 20세부터 61세까지의 41년이고, 2기는 은퇴 후 70세까지의 8년, 3기는 85세까지의 마지막 기간이다. 그는 자신의 은퇴 후 꿈을 '저소득층 상담'으로 정했다. "내 경험을 살려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상담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가 정한 '인생 2기'는 자신의 꿈인 상담원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은퇴 8개월 뒤 퇴직한 다른 교장 몇 명과 힘을 모아 현역 교사들에게 수업을 잘하는 노하우를 컨설팅해 주는 컨설팅센터를 꾸렸다. 그는 해마다 독학으로 상담과 관련된 자격증 10개를 땄다.그는 일일계획표, 주간계획표, 인생계획표 세 가지 표를 항상 만들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는 "단 1분도 허비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목회를 꾸려 매월 4차례는 반드시 산행(山行), 매월 1차례 서점 가기, 매일 1시간 30분씩 부인과 걷기, 아침에 시 10편씩 읽기 등 일상 생활도 시간표에 맞춘다.부인은 "40년 바쁘게 살았는데 늙어서도 이 생활이 질리지 않느냐"는 구박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인에게 "쓸모있게 오래 살려면 어쩔 수 없다"며 웃어 준다고 한다.
"30년뒤 라면 1봉에 4900원(과거 30년간의 가격 인상 추세로 오를 경우)"…
물가 고려해 노후자금 따져보자
인플레이션 복병 대비하라개인연금·퇴직연금 수익률, 물가상승률에도 못 미쳐… 국민연금만 물가 상승 반영은퇴자와 밀접한 서비스인 간병비 등은 더 빨리 올라
은퇴 후엔 싸워야 할 게 많다. 질병, 부족한 소득, 남아도는 시간과 싸워야 한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다.직장인 박영철(38)씨는 지난 2005년부터 월 20만원씩 개인연금을 넣고 있다. 총 20년간 납입하면 만 55세부터 5년 동안 매월 164만원(현재까지 수익을 기준으로 한 추정치)을 받는 상품이다. 총액으로 하면 9800만원 정도로 납입 원금(4800만원)의 두 배 이상 받는 셈이라 내심 뿌듯했다. 직장을 55세에 그만둔다 해도 국민연금이 나오는 만 65세까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웬걸 그 돈을 미래 가치로 계산해 보니 얘기가 달라진다. 앞으로 매년 4%씩 물가가 상승한다고 가정할 때, 박씨가 55세가 되는 2029년의 164만원은 현재 가치로 따지면 84만원 수준이다. 물가가 5% 상승한다면 월 70만원 정도밖에 안 된다. 박씨는 등골이 서늘해졌다.◇인플레이션, 은퇴자금의 복병박씨만의 고민은 아니다. 1982년 이후 30년 동안 우리나라 물가는 230% 올랐다.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구매력은 3분의 1로 떨어졌다. 연평균 4.3% 정도씩 올라 지난해 물가상승률(4.0%)과 비슷한 수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체감 물가 상승률은 정부가 발표하는 공식 물가 상승률을 늘 웃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30년 전 보통 라면 한 개가 100원이었는데, 지금은 700원으로 올랐다. 이 같은 추세로 오르면 30년 뒤 라면 한개가 4900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재룡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은 "간병비나 요양시설 이용료 등 은퇴자들과 밀접한 개인서비스 요금은 인건비가 반영되는 특성 때문에 일반적인 소비자 물가 상승률보다 더 가파르게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흔히 연금 3종세트(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를 제대로 활용하면 은퇴자금을 준비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물가 상승이라는 복병이 있다. 연금 3종 세트 중 미래의 물가 상승을 반영하는 것은 국민연금밖에 없다. 국민연금 의무가입 대상자가 아닌 사람 중에 최근 국민연금에 '임의가입'하는 사람이 급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국민연금은 통계청이 발표하는 전년도 소비자물가지수를 반영해 매년 4월 연금 급여액을 조정하도록 법에 못박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국민연금을 월 50만원씩 받았던 사람이라면, 올해 4월부터는 연금액이 52만원으로 오르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물가가 4% 올랐기 때문이다. 현재 국민연금을 붓고 있는 사람들도 물가가 오르는 만큼 나중에 받는 연금액이 오른다. 직장인 이모(39)씨는 만 65세 때부터 월 110만원(현재 가치)의 국민연금을 받게 될 예정인데, 연 4%씩의 물가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65세가 되면 월 293만원이 나온다.물론 국민연금의 경우도 한 가지 불확실성은 있다. 연금을 내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너무 많아져 연금 고갈 가능성이 생기면 국민연금이 연금 지급 시기를 더 늦추거나 지급액을 줄일 수도 있다.◇물가 못 따라잡는 연금상품 수익률'이자에 이자가 붙는 연복리, 연 최고 400만원까지 소득공제, 만기 유지시 원금 보장….' 한 금융사의 개인연금 홍보문구다. 어디에도 물가 리스크를 막을 수 있다는 얘기는 없다.연금 3종세트 중 개인연금과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방어하지 못한다. 게다가 요즘은 수익률마저 물가상승률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은행권의 대표적인 연금상품인 '연금신탁(채권형)'의 지난해 수익률을 보면 그나마 가장 높았다는 기업은행도 3.3%에 머물러 물가상승률(4%)에 못 미쳤고, 물가를 감안한 수익률은 마이너스였다. A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유럽재정 위기 등으로 주가는 하락하고 채권수익률도 낮아 기대했던 수익률을 거두지 못했다"고 말했다.증권사들이 팔고 있는 연금저축 펀드의 경우 명목 수익률도 마이너스였다. 펀드 평가업체인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주식형 연금펀드의 지난해 수익률은 평균 -9.7%였다. 수익률이 물가상승률+��여도 아쉬운 판인데 말이다.◇여유 자금 일부 공격 투자에 할애물가와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투자 포트폴리오의 일부를 공격적인 투자에 할애하는 것도 방법이다. 김진영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장은 "은퇴 전 모아놓은 돈 일부를 은퇴 후 5년 안에 주식 등에 투자해 돈을 불리는 방식으로 조금 더 공격적으로 재테크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여유자금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경우다.흔히 은퇴자들은 자신의 은퇴자금을 리스크가 전혀 없는 예금에 묵혀 놓든지, 반대로 리스크가 주식보다도 훨씬 큰 자영업에 왕창 털어 넣든지 하는 양극화된 투자 패턴을 보인다. 이를테면 '모 아니면 도 식' 재테크인데 이를 벗어나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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