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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제주이야기

한국사와 제주도

by SL. 2012. 9. 23.

한국사와 제주도

 

6·25 전후 핍박 받았던 제주…한민족 역사 속 이방인 취급
다문화사회 성찰 계기 삼아야

김석익(金錫翼·1885~1956)은 20세기 제주학(濟州學)의 거장이다. 그는 《탐라기년(耽羅紀年)》《탐라지(耽羅誌)》《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등 탐라에 관한 많은 저술을 완성했는데, 한국사학사에서 이렇듯 한 유학자가 자기 고장의 지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의 제주사 한 토막을 보며 한국사에서 제주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심재집(心齋集)》책2 ‘탐라기년보유(耽羅紀年補遺)’다.

“무자(戊子) 건국준비 4년 단기 4281년. 이 해에 건국하니 대한(大韓)이다. 4월3일 산군(山軍) 소동이 발발했다. 작년 3월1일 이후부터 경관대(警官隊)가 위복(威福)을 자행해 조금이라도 관변에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으면 일망타진해 매질하고 훈도했다. (…) 이에 일종의 피의자들이 무리를 모아 이끌고 산간에 피해 들어가 몰래 공작을 행했다. 마침 국회의원 선거를 기회로 삼아 일시에 선거 각 구역을 습격해 인명을 살해하고 사무소를 불사르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4·3 사건이다.”

“12월에 2연대장 함병선이 타고 남은 마을들을 소탕하고 서북민(西北民)을 본도(本島) 안에 옮겨 놓았다. 마침 내무부 장관 신성모가 선무하고 훈시해 끝내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살피건대 송요찬과 함병선의 전후 소탕은 아, 참혹하도다. 이런 때를 당해 둘 사이에 끼여 있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했겠는가. (…) 기축년(1949) 봄 내무장관 신성모가 와서야 비로소 살육의 정치가 멈추었다. 하지만 이어서 경인년(1950)이 되자 6·25 사변이 발생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고 명망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소탕돼 거의 모두 죽었다. 아아, 슬프도다.”

언젠가 ‘바다로 보는 한국사’라는 주제로 수업을 한 일이 있다. 이야깃거리도 많으면서 산뜻한 역사 지식을 선사하는 곳은 제주 해역이었다. 제주 해역은 탐라국의 고유한 지역적 전통이 있었고 한반도의 안과 연결된 역사, 한반도의 바깥과 조우한 역사가 중첩해 있는 이색적인 지역이었다. 지방사와 국사, 세계사가 동시에 펼쳐진 국카스텐 같은 곳 말이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제주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 역사에 제주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계사에 유례가 드물게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시대 이후 1000년간 단일한 국가가 지배해 왔고 그랬기에 한국사의 복수성(plurality)을 역사적으로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문화적으로 균질적인 한반도 중심부 위주의 생각일 수 있다. 우리나라 강역은 그런 전형성을 넘어선다. 이와 관련해 장지연은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왜 제국인지 입증하기 위해 두 가지 증거를 제시한 일이 있다. 대한의 지역적 구성을 보면 이미 조선시대부터 남으로 탐라와 북으로 말갈을 아우르는 제국의 공간을 갖추었고 또 중국에서 명이 멸망한 후 대한이 진정한 역사적 계승자가 됐다는 설명이다. 우리 역사 안에 적어도 탐라와 말갈이 속해 있다는 사실, 비록 장지연은 이를 통해 단지 제국의 성립 요건을 추구한 것이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우리 역사의 복수성, 다양성, 다원성을 사유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남북분단과 전쟁을 전후한 시기 이 땅의 백성들은 체제와 이념이 다른 한 민족 두 국가에 의해 고통을 당했다. 제주의 4·3 역시 그런 비극의 하나였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야말로 반공 국가에서 양산된 우리 안의 타자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대 우리 안의 타자가 어디 그뿐인가. 멀리는 ‘순이 삼촌’에서 가까이는 탈북자와 다문화가정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는 내부적인 타자가 전례 없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타자와 소통하는 역사학이 절실히 요청되는 지금, 제주는 그런 역사학적 성찰의 특별한 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