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ㆍ부자 나오는 '완사명월형'자리
성북동(城北洞)은 이름 그대로 도성 밖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4대 문을 경계로 도성 안쪽을 '문안', 그 밖을 '성밖'이라 불렀는데 산 들이 높지 않은 성북동은 민가가 성곽 아래까지 들어차 성의 북쪽을 의 미하는 지명을 얻은 것이다.성북동은 넓은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들이 북한산 기슭에 모여 있는 한 국의 전통적인 부자촌이라 고층 아파트로 대변되는 강남의 신흥부촌과는 성격이 다르다. 성곽을 쌓은 남쪽 능선이 마을의 백호가 되고, 정릉동과 경계를 이루며 동남진으로 뻗은 북악 스카이웨이 능선이 청룡이 돼 부지 를 감싼다. 또 성북동의 중심 지맥은 마전터를 향해 동남방으로 뻗었는 데 마전터 가까이에는 선잠단(先蠶壇)이 있었다. 선잠단은 누에치는 것 을 처음 시작한 중국의 서릉씨(西陵氏)를 모셔놓고 제사 지내던 제단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천의 형세를 살펴 그 성격과 지기(地氣)에 맞는 지명 을 지었다. 따라서 선잠단이 설치된 성북 2동은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이 분명하다. 완사명월이란 '밝은 달빛 아래에 비단을 펼쳐 논 형세'로 비단은 높은 벼슬아치나 부자만이 입을 수 있는 귀한 옷감이다. 이것을 달빛 아래에 깔아놓았으니 세상에 이름을 날릴 귀인이나 부자를 끊임없이 배출하는 터다. 또 성북동은 '택리지'가 제시한 '마을이 들어설 지리적 조건'이 뛰어난 곳이다. 마을입구는 꼭 닫힌 듯 보이고 그 안쪽에 넓은 공간이 펼 쳐졌으니 양명한 기운이 좋아 대를 이어 부를 누릴 수 있는 명당터다.
그렇다고 문제가 전혀 없는 완복지지(完福之地)만은 아니다. 기(氣)가 센 곳이기 때문이다. 기가 세다는 뜻은 흙심이 두껍지 못해 암반이 그대 로 드러난 곳을 말하며 이런 곳은 척박한 토지라서 생산력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터는 백성이 살 곳은 못되고, 생업과 동떨어져 음풍농월 을 즐기는 고관이나 부자들에게 알맞은 땅이다. 성북동은 결국 지기는 쇠약하나 만물이 성장하는 햇볕 같은 양기만큼은 좋은 터라 할 것이다. 여기서 성북 2동이 지금보다 더 복된 마을로 발전하려면 약한 지기를 비보(裨補)할 필요가 있다. 지덕(地德)을 크게 하려면 숲을 울창하게 가 꾸는 것이 최고의 비책이다. 나무는 바위를 부수어 흙을 만들고 풍우에 흙이 쓸려 달아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박인호의 현장 르포]- 구자경ㆍ이동찬 등 대
기업 오너 70년代 둥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 그래서 부자는 선망의 대 상이다.우리나라 부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이 모여사는 부촌(富村)은 어떤 곳일까. 풍수지리학적으로 부를 계속 누릴 수 있을까. 부자는 존 경받기도 하지만 때론 멸시와 질시의 대상이 된다. 부촌에 사는 것으로도 '대 한민국 1%'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천민 자본주의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우리 경제의특성상 부자들은 당당하지만은 않다. 70,80년대부터 전통적 부 자동네인 서울 성북동과 한남동의고급 주택단지부터 새천년 신흥 부촌으로 떠오른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부촌을 시리즈로 소개한다.<편집자주>]
삼청공원 옆의 가파른 2차선 도로를 지나 삼청터널을 빠져 나가면 '한국 부촌 1번지'로 통 하는 성북동길에 이른다. 왼쪽편 언덕빼기에 큼지막하게 둥지를 튼 주택가는 한가롭기만 하다. 성북초등학교 뒤편까지 넉넉한 산자락에 자리잡은 고급 단독주 택가가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곳 이 바로 '하늘이 낸다'는 부자 들이 모여사는 전통 부촌 성북 동(정확히 말하자면 성북2동).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아 남향으로 난 창들이 유 난히 반짝인다. 북한산을 배경삼아 넓은 정원을 낀 고풍스러운 한옥과 양옥들이 어우러져 풍족함과 정갈함이 절로 느껴 진다. 인적이 드문 탓일까, 외지인에게는 고독감이 밀려온다.
성북동이 한국 부촌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성북동은 60년대까지만 해도 부자동네라기 보다 권력 실세들의 집결지였다. 박정희 정권시절 청와대에서 가까워 차지철 전 대통령경호실장, 양택식 전 서울시장 등 정ㆍ관계 인사들이 처음으로 이곳에 자 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당시는 정치권력이 우세했던 개발독재 시절이라 권력 주변에는 자연스레 '돈'이 모여들었다. 청와대에서 가까운 성북동이 부촌으로 탈바꿈한 이유다. 지난 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대기업 총수를 비 롯한 부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청와대에서 가까운 성북동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구자경 LG명예회장,이동찬 코오 롱 명예회장 등 대기업 오너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대기업이 소유하고 있는 영빈관은 정ㆍ재계 고위 인사들의 사교장이기도 했다.
성북동에는 성락원마을,꿩의 바다마을, 대교단지 등 고급 주택단지가 잇따라 형성돼 있다. 성락원 마을은 사적 제378 호로 지정된 성락원(城樂園)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성락원은 거의 원형으로 보 존된 전통적인 사저로 입구에 들어서면 계곡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 전통정자인 송석정과 그 아래 연못이 어우러져 한폭 의 수채화를 연출한다. 성락원 마을 서쪽에는 '꿩의 바다 마을' 이란 독특한 이름의 고급주택가가 언덕 위에 들어서있다. 성북구 문화체육홍보과 한재현 담당은 "이곳이 바로 유명한 시 '성북동 비둘기'의 탄생지"라며 "당시 새 들의 천국이었던 이곳이 고급주택가로 변 해가자 시인 김광섭 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고 들려줬다. 꿩의 바다마을 서쪽 일대는 삼청주택 단지 또는 대교단지라고 불린다. 고급 주 택단지와 대사관저가 밀집한 곳으로 이 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곳에는 다수의 재벌 총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성북동 부촌에 살고 있는 재벌1세 대 및 중견기업인은 1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구두회 LG창업 고문을 비롯한 71명은 지난 96년 10월 당시 10억원을 출연,성북문화원을 설립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문화원장을 맡고 있는 구두회 LG 창업고문을 비롯해 김영대 대성그룹 회 장, 임충헌 한국화장품 회장, 박승주 미륭 상사 회장, 김각중 경방 회장, 이우영 그 랜드힐튼호텔 회장, 조창석 삼영모방 회 장 등 50여명의 기업인이 문화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또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조 양래 한국타이어 회장,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김영준 성신양회그룹 회장,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윤덕병 한국야쿠르 트 회장,이병무 아세아그룹 회장, 박용성 상공회의소회장, 백성학 영안모자회장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인들도 성북동 주민이다.
성북동에는 전통 부자들과 외국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대사관저 22곳 가 운데 성북2동 330 일대에만 10곳이 몰려있다.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캐 나다 칠레 호주 알제리 등 6대주를 망라 한다. 특히 독일관저는 땅만 1만2140평 에 달하는 대저택이다. 일본(2000평), 호 주(738평), 오스트리아(568평)등도 규모 가 큰 편에 속한다. 전통 한옥으로는 지방민속자료로 지정 된 이재준가(제10호)와 상허 이태준 고택 (제11호)이 눈길을 끈다. 1900 년께에 건 립된 한옥인 이재준가는 조선 말기 상인 들의 별장으로 당시 호상(毫商)들의 생활 상을 알아볼 수 있는 재미있는 집이다. 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일본에 저항하며 말 년을 보냈다는 심우장도 있다.
부자들이 모여사는 고급 단독주택 밀집 지역이라 성북동 부동산시장은 거의 움직 임이 없다. 돈이 궁하지 않은 재벌 1세대 및 중견 기업인들이 눌러 사는 곳이라 매 물이 거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 중개업소에서는 성북동 일대에 들어선 고급 단독주택이 총 1000가구 정 도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대지 200 여평에 건평 100평짜리가 많다. 정부광화 문청사와 가깝기 때문에 대사관저 외에 외국인들이 세들어 사는 집도 많다. 시세는 대략 평당 800만원 선이지만 조용하고 외진 곳일수록 비싸 평당 1000 만원 이상하는 곳도 있다. 인근 성암부동산 이영열 사장은 "매수 희망자는 있지만 매물이 없어 6개월에 고 작 한 건 정도 거래된다"고 말했다. 또 하 나의 특징은 부자들의 거래인 만큼 가격 흥정이 거의 없다는 것. 성북동 부자들은 부동산 재테크와 절세에 특히 관심이 높다. 신한은행 고준석 부 동산재테크팀장은 "100억원 이상 자산을 가진 전통적인 큰 부자들은 여전히 강남 보다는 성북ㆍ한남동 등 강북에 많다"며 "연령은 평균 60대 중반으로 부동산을 통 해 부를 축적했기 때문에 부동산을 중요 한 투자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노년층이 많아 절세에 관심이 높다. 성북동 부자들은 일제 강점기와 6ㆍ25를 거치면서'소비는 미덕' 이 아닌 '아껴야 잘산다'를 몸소 실천해온 타입이 많다. 부자지만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 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드물다는 것이 오 랫동안 이들을 상대해온 동네 사람들의 얘기다.박인호 기자)ihpark@heraldm.com)
[대표적 문화시설]-고고한 간송미술관…전통공연 삼청각 …
부자동네 답게 성북동의 문화시설은 고고함을 자랑한다. 그 중에서도'국내 최고의 사립미술관'으로 꼽히는 간송(澗松)미술관은 특히 그렇다. 성북동 주택가에 '콕' 숨어있는 간송미술관은 조선시대 서화, 도자기등 수집품 수준에 있어선 단연 정상급이지만 겉치장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요즘 문화시설과는 너무 동떨어질 정도로 건물외관이 소박하다. 앞뜰이며 주변을 치장하지 않아 쇠락한 느낌마저 준다. '중요한 건 껍데기가 아니라 내용'이란 도도함이 절로 느껴진다. 이 미술관은 전시회라고 해봐야 1년에 봄ㆍ가을 딱 두 차례만 연다. 전시를 열어놓고도 홍보도 별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 만한 사람은 해마다 두 번씩 구불구불한 성북동 길을 오른다.
고려청자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겸재 정선의 '고사관폭', 추사 김정희의 '행서대련' 등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명품들을 직접 감상할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인'혜원전신첩'은 '고급 에로티시즘'의 극치를 보여줘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내곤 한다. 이들 미술품은 우리문화재 사랑에 평생을 바쳤던 간송 전형필 선생(1902~1962)이 사재를 털어 수집한 것이다. 교육자이자 미술사가였던 간송은 인사동을 즐겨 찾곤 했는데 중간상의 걸음걸이만 보고도 가슴에 품은문화재가 어떤 수준인지 알아차렸다고 한다. 일급 문화재를 품은 중간상은 즉시 불러세워 후하게 사례한 후 사들였음은 물론이다. 간송의 열정덕에 일본으로 유출될 뻔한 훈민정음 원본 등 국보급 문화재들이 성북동4000여평 대지 속에 고스란히 숨쉬고 있는 셈이다.
한편 70년대 '밀실 요정 정치'로 유명했던 성북동의 또다른 명소 '삼청각'은 요즘 전통문화공연장으로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6000여평의넓은 대지에 한옥 6채로 이뤄진 삼청각은 90년대 말 고급 빌라단지로 바뀔 뻔 했으나 이제 각종 전통공연이 빈번하게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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