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숭겸 장군 연보
◇신숭겸 장군 충렬도(사진 위쪽) ◇영각 유허비(사진 아래 왼쪽) ◇신숭겸 장군 위패 ◇신숭겸 우표 날인 | |
■ 생년 미상. 평산 신씨(平山申氏)시조. 신 라말 전라도 곡성에서 출생해 광해주(춘 천)으로 이주. 고려사에는 원래 이름은 능 산(能山)이고 광해주 사람이며,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고 기술. ■ 918년 태봉의 기장으로 배현경·홍유·복지 겸 등과 협력해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 ■ 927년(태조10년) 공산전투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 왕건이 포위되자 김락 등 과 함께 태조의 갑옷으로 갈아입고 태조 를 구출한 뒤 순국. 태조는 머리가 없는 신 숭겸의 시신을 수습해 순금으로 두상을 만 들어 매장한 후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림. 그의 아우 능길과 아들 보를 모두 원 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를 창건해 그들 의 복을 빌게 함. ■ 994년 4월 태사(太師)로 추증돼 태사개 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 廟)의 태조사당에 배향됨. ■ 1120년(예종 15년) 고려 16대 임금 예종 은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해 도이장가(悼 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음. 곡성의 양덕사, 대구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 평산의 태백산성사 등에서 제향. ■ 1589년(조선 선조 22년) 신숭겸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덕양서원 창선. 신 숭겸 위패를 모심. ■ 1832년(순조 32년) 승정원 도승지 신정 위가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의 유 허지에 비문의 시를 짓고 영각 유허비(영 각 유허비)를 세움. ■ 1848년(헌종 14년) 유림에서 영각 유허 비를 보존하기 위해 비각을 세움. 매년 음 력 9월9일 문중에서 합동으로 향사를 지냄. ■ 1897년(광무 원년) 신숭겸이 탄생한 곳 을 매입해 유허비를 세움. 1929년 단을 모 아 용산단으로 칭함. 신숭겸 태를 묻었다 는 단소와 용산재, 구룡문 등이 있음. ■ 1976년 장절공 묘역 도기념물 제21호로 지정, 한국 4대 명당지로 선정. 매년 4월 춘기제례 봉행. ■ 2004년 10월 평산신씨 대종중에서 신숭 겸 묘역 입구에 장군의 동상을 건립. 동상 은 운보 김기창화백이 그린 영정을 토대 로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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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신재 한림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장절공 신숭겸 장군 신숭겸은 원래는 궁예의 부하 궁예의 폭정 심해지자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 이가 곧 태조 생명 걸고 킹에이커 역할 성공 어느날 왕과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 하늘 높이 기러기 세 마리 날았고 그는 "너느 기러기 쏠까요?" "세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 명중했고 태조는 이를 기념하여 평산으로 본관을 삼게 하였다 평산(平山) 신(申)씨 시조 된 이유 개국공신 그는 벼슬 욕심 없이 왕을 대신해 죽은 충신 태조가 견훤의 군대에 포위되자 병거(兵車)를 타고 과감히 돌진 견훤군은 그의 목을 치고, 태조는 위기를 모면하였다 왕은 국가적 행사로 그를 추도 춘천에 있는 묘는 봉분이 세 개 그가 전사했을 때 머리를 잃어 태조가 금으로 주조해 합쳐 장사 혹시 몰래 건드릴까 두려워 봉분 셋으로 만들어 분간 못하게 해 이것이 1,000년 전의 일이다 1120년 10월15일, 서경(西京), 팔관회(八關會). 이때는 고려 제16대 왕 예종 15년이고, 서경은 지금의 평양이다. 고려시대의 팔관회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 국가 지배계층의 권력 서열을 확인하고 결속을 다짐하는 단합대회, 가무백희를 즐기는 축제 등의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종합적인 의례이다. 개경(개성)에서도 거행하고, 서경에서도 거행했는데 서경에서는 영봉문, 흥국사, 장명사 등에서 거행했다. 예종이 팔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개경에서 서경으로 온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이 팔관회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두 가상(假像)이 관모를 쓰고, 비녀를 꽂고, 자줏빛 관복을 입고, 금빛 홀(笏)을 들고, 말을 타고 뛰면서 뜰을 돌아다녔다. 예종이 이상하게 여겨 저들이 누구냐고 묻자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신숭겸과 김락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오래전에, 정확히 말하면 193년 전에 죽어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이에 앞서 제1대 왕 태조가 서경에서 팔관회를 베풀 때에는 이러한 일이 있었다. 신하들과 팔관회를 한창 즐기다가 태조는 불현듯 신숭겸과 김락이 보고 싶었다. 임금을 대신하여 죽은 충신! 이 즐거운 자리에 그들이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태조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짚으로 신숭겸과 김락의 인형을 만들고, 조복을 입히게 했다. 그리고 이 즐거운 자리에 함께 앉게 했다. 태조는 신숭겸의 인형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그 술은 곧 없어졌다. 신숭겸의 인형은 술에 취하여 일어나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춤을 추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인형극이다. 팔관회에서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는 인형극을 한 것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씻김굿(오구굿)을 한 것이다. 씻김굿에서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워놓은 `영돈'은 망자의 상징이다. 태조는 이러한 추도극을 매년 거행하도록 했다. 예종 때의 팔관회에서 가상이 말을 타고 뛰어다닌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가면극이다. 신숭겸과 김락이 전쟁터에서 태조 대신 죽는 장면을 광대 두 명이 가면극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연극사에서 인형극이 가면극으로 변모한 사례이다. 시인이기도 한 예종은 느꺼운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시를 지었다. “충의는 천고에 빛나고 / 살고 죽음은 한때의 일 / 임금 위해 칼날에 서니 / 이것이 나라 터전 지키는 일”(忠義明千古 死生惟一時 爲君蹄白刃 從此保王基 - 후반부). 그러나 예종은 시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광대의 몸을 빌려서 팔관회 현장에 나타난 신숭겸과 김락의 모습을 보면서 일어나는 벅찬 감격을 한문으로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거기에다 한시는 일부 지식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종은 시를 다시 지었다. 이번에는 우리말로 읊었다. 그는 벅찬 감격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시, 글로 쓴 시가 아닌 말로 노래하는 시, 모든 백성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읊고 싶었다. “님을 온전케 하온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 넋이 가셨으되 / 몸 세우고 하신 말씀 //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 마음 새로워지기를 / 좋다 두 공신이시여 /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김완진 해독). 우리말을 적을 문자가 없어 그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향찰(鄕札)로 적었다. 이것이 곧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마지막 향가인 `도이장가(悼二將歌)', 즉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을 추도하는 노래이다. 이 향가의 전반부는 무한한 공간을 노래하고, 후반부는 영원한 시간을 노래한다. 두 장군의 넋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위기에 처했던 `님'(여기서 `님'은 태조 왕건이자 나라이다)을 온전하게 한 그 충절의 마음은 땅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가득 차 있다. 그 충절의 마음이 지금 광대의 몸을 빌려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전반부). 두 공신의 마음은 영원히 살아서 오늘날 나랏일을 맡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구나(후반부). 신숭겸은 927년에 지금의 대구인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전사하였다. 927년은 신라(경순왕 1년), 후백제(견훤 36년), 고려(태조 10년)가 공존하던 때이다.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가자, 고려와 후백제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태조와 견훤이 공산 동수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태조의 전세가 불리하였다. 태조는 견훤의 군대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에 신숭겸이 태조의 병거(兵)를 타고 김락과 함께 견훤군 쪽으로 과감하게 돌진하였다. 신숭겸은 태조의 병거를 탔을 뿐 아니라 얼굴의 모습도 태조와 비슷했다. 견훤군은 신숭겸을 집중적으로 에워쌌다. 그들은 신숭겸의 목을 치고, 그의 얼굴을 창에 꿰어 높이 들고, 태조를 죽였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러는 통에 포위가 풀어지고, 태조는 위기를 모면하였다. 신숭겸은 원래는 궁예의 부하였다. 그는 궁예의 마군(馬軍) 소속 기장(騎將)이었다. 궁예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신숭겸은 같은 기장들인 홍유, 배현경, 복지겸과 함께 자기들의 상관인 궁예를 몰아내고, 역시 궁예의 휘하에 있는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건은 918년 6월 15일에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고려 태조이다. 신숭겸은 생명을 걸고 킹메이커 역할을 수행하여 성공을 하였다. 성공을 하고 나서 그는 그 성공을 누리는 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개국공신으로 표창만 받았을 뿐,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왕은 숭겸 등 무인들을 데리고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갔다. 그들은 삼탄(三灘)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때 하늘 높이 기러기 세 마리가 날고 있었다. 누가 쏘겠느냐고 태조가 물으니 숭겸이 나섰다. 숭겸이 “어느 기러기를 쏠까요?” 하고 물으니 태조는 웃으면서,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라고 하였다. 숭겸은 말을 타고 달려 나아가 주저하지 않고 활을 쏘았다. 화살은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명중시켰다. 태조는 감탄하며 이를 기념하여 평산으로 본관을 삼게 하였다. 또한 기러기를 쏜 근처의 밭 300결을 하사하고 그곳의 지명을 궁위(弓位)라고 지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숭겸(崇謙)은 평산(平山) 신(申)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마도 신숭겸의 생애에서 이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나라를 새로 세우는 큰일을 해내고도, 그 나라에서 높은 벼슬 하지 않고 지내던 이 시절.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신숭겸의 묘가 있다. 이 묘는 봉분이 세 개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묫자리는 원래 도선(道詵)이 왕건을 위해서 잡아놓은 명당인데 왕건은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신숭겸에게 이 명당을 내주었다고 한다. 신라말 음양풍수설의 대가인 도선은 왕건의 탄생과 그의 건국을 예언한 바 있다. 왕건은 도선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를 사상적 스승으로 섬겼다. 이 묘역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1805년에 세운 것인데 비문을 지은이는 김조순(祖淳, 1765~1832년)이고, 글씨를 쓴이는 신위(申緯, 1769~1845년)이다. 신위는 신숭겸의 후손이고, 춘천부사를 지냈었다(1818~1819년). 이 비문에 의하면 “높다랗게 솟은 봉분이 세 개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오기를, 태사(太師, 곧 신숭겸)가 전사하였을 때 그의 머리를 잃어 고려 태조가 태사의 얼굴을 금으로 주조하여 시체에 합쳐 장사를 지내면서 혹시 몰래 이것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어 잘 분간할 수 없게 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사연이 있다고도 하나 “연대가 오래되고 문헌을 상고할 수 없어”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어쨌든 신숭겸 묘의 봉분이 세 개인 것은 스토리텔링의 좋은 자료이다. 역시 비문에 의하면 신숭겸은 백제 땅 욕내(지금의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아마도 광해주(지금의 춘천)로 이주해온 듯하다고 한다(其先出百濟欲乃郡 而史稱光海州人 欲乃今谷城縣 光海卽春川 或自谷而遷於春也). 신숭겸은 왕건을 고려의 시조로 만들어주었고, 태조 왕건은 신숭겸을 평산 신씨의 시조로 만들어주었다. 개국공신 신숭겸은 벼슬자리 등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다가 왕이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고, 태조 왕건은 신숭겸을 추도하는 일을 국가적 행사로 이어가게 했다. 이것이 1,000년 전의 일이다. 1,000년 전의 일이, 요즈음의 정치 상황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처신 방법과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군인들에 대한 국가적 대우의 정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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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도연씨와 찾아간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 고등학생 시절, 강촌에 살던 내 친구는 평산 신씨였다 그 친구로부터 처음 신숭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에서 머리가 잘려 황금으로 대신 만들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봉분을 세 개나 만들었는데 그 묘가 바로 서면에 있다는 얘기까지… 춘천에서의 청춘 시절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번개시장 건너편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다 뱃전에 기대 어디로 가야 되는지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의 길 없음에 마음이 어지러운 날, 당신, 소양로 소양다리 아래편 나루에서 금산 가는 배를 한번 타시길. 금산에서 매운 짬뽕 한 그릇 드시고 걷고 걸어 천 년 전 한 사내의 길을 가만히 훔쳐보시길. 다시 그 배 타고 노을을 등에 진 채 돌아와 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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