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광수 감독 “혼인신고까지 할 것… 반려 땐 헌법소원
2013-05-15
ㆍ동성 파트너와 함께 공개 결혼식 발표
“결혼식을 한 뒤 혼인 신고를 할 것입니다. 반려될 가능성이 높지만, 반려된 것을 근거로 헌법소원을 제기하겠습니다.”
15일 서울 동작구 예술영화관 아트나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성 공개 결혼식을 발표한 김조광수 영화감독(48)의 말이다.
그는 “동성애 결혼은 불법이 아니다. 합법이 아닐 뿐”이라며 “이성애자들이 당연히 누리는 권리인데 동성애자들에겐 합법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고 말했다.
“동성결혼 합니다” 김조광수 영화감독(왼쪽)과 김승환씨가 15일 서울 사당동 아트나인에서 동성결혼식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김조 감독은 9월7일 공개적인 장소에서 결혼식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 강윤중 기자
박근혜 대통령과 안철수·문재인 의원 등 정치인들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밝힌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시장에게 결혼식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김조 감독 연인인 김승환씨(29)도 참석했다. 김씨가 공개석상에 나선 건 처음이다. 두 사람은 2004년 게이 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만나 2005년부터 9년째 교제해왔다.
김조 감독은 “2005년부터 공개 결혼식을 마음 먹었는데, 함께 미래를 꿈꾸고 생각을 같이 하는 파트너를 만나 (공개 결혼의) 꿈을 실현하게 됐다”고 했다. 김승환씨도 “부모님을 비롯해 친지, 지인, 친구들에게 김조 감독과의 관계뿐 아니라 결혼에 지지와 응원을 받게 돼 이 자리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 유명 인사가 동성애자임을 밝힌 적은 있지만 동성끼리 공개 결혼식을 치르는 건 김조 감독이 처음이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더라도 ‘법적 지위’는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 민법은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조 감독은 “국회의원들을 설득해 입법화를 추진하고, 국민 의견을 묻는 행사 등을 진행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들은 동성애자는 존재하는 것이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김조 감독은 “존재하는 동성애와 동성애 반대 의견을 같은 선상에 놓지 마라. 사람을 혐오하는 건 인권이 아니다”라고 했다.
김조광수 영화감독(왼쪽에서 두번째)이 15일 서울 사당동 아트나인 야외무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연인 김승환씨와 ‘동성 결혼’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기독교계의 반대에도 우려를 표명했다. 자신을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라고 밝힌 김조 감독은 “천주교도 빨리 동성애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보수 개신교에서는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한다고 주장하는데 다른 해석도 많다”며 “진보 기독교나 영국 성공회에서는 동성애자 목사나 주교도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미국, 베트남 예를 들며 동성애 인정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말한 김조 감독은 “한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며 “10년 안에 커밍아웃하는 정치인이 분명히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9월7일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구체적인 장소는 결정되지 않았다. 축의금은 성적소수자를 위한 ‘무지개 센터’ 건립에 사용한다.
김조 감독은 “세계 대다수 도시에 1~2개의 성소수자 센터가 있다. 우리는 논의조차 없다”고 말했다. 김승환씨는 “뉴욕에 있는 성소수자 센터는 지역 주민과 연계 교육 등으로 시의원을 배출하는 등 지역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김조광수 감독은 기자회견 후 경향신문과 따로 만나 “센터를 통해 동성애자들이 혐오 대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막연한 혐오감을 가진 사람도 우리를 만나면 인식이 바뀔 것”이라며 “10만명의 하객이 1만원의 축의금을 내 10억원을 모으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김승환씨는 “앞으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많이 생길 것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공격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는 여성-흑인-성적소수자들의 평등으로 변화해왔다. (동성애 평등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라며 “그런 물결 속에서 내가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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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0대 동성애자의 고백… 직장에서도 야한 사진 권하며 “성전환수술 할 거니
ㆍ동성애 알게 된 가족 “특이병… 때리면 고칠 수 있다”
김형태씨(30·가명·사진)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사랑에 빠졌다. 같은 반 친구였다. 바라만 봐도 두근두근 떨렸고, 눈을 감으면 그의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느낀 설렘이었다. 형태씨는 ‘이건 사랑이 아냐’라며 수없이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 부정할수록 감정은 짙어졌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남자였다.
죽고 싶었다. 남자를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다. 형태씨는 자신이 돌연변이나 외계인이 아닌가라고 의심했다. 그럴수록 더 의기소침해졌다. 그를 유심히 지켜본 선생님은 “형태야, 너 지금 죽고 싶단 생각 하는 것 아니지”라며 염려했다. 하지만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남몰래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동성애’라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감정을 들킬까봐 짝사랑하는 친구와도 일부러 거리를 뒀다.
형태씨가 22살이던 해 어느 눈 오는 밤. 그는 평소처럼 짝사랑하는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다 “감기 조심해라. 춥다”고 말했다. 친구는 “네가 걱정해주니까 무섭다. 나는 여자가 좋다”고 강경한 목소리로 답했다. 고백 한번 못해본 채 6년간의 짝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펑펑 울었다. 역시 ‘내 편은 없구나’라는 생각에 억울하고 서러웠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대학 4년간은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바빠 연애에 관심없는 이성애자인 것처럼 지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나’로 살 순 없었다. 적어도 한 명에게만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다. 어렵게 친형에게 말을 꺼냈지만,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형에게 누군가는 “때리면 고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형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누나는 “특이병에 걸린 것이니 곧 나을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매번 TV나 인터넷에서 동성애자를 변태성욕자로 왜곡되게 묘사한 것을 보고 “너도 그러느냐”고 물었다. 평생을 같이해온 가족이 자신보다 TV에서 얻은 잘못된 정보를 믿는 것 같아 배신감이 치솟았다. 형태씨는 “집이 전쟁터였다. 내 존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큰 전쟁을 벌이는 것 같았다”며 “집에서 밥을 먹으면 매번 체할 만큼 불편해 결국 독립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8살이 되던 해 친분이 있던 동료 3명에게 자신의 존재를 털어놨다. 각각 “네가 잘못 안 걸 거야” “네가 여자 경험이 없어서 그래” “너 성전환수술 하는 거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들은 형태씨에게 야한 사진을 권했고, 회식 때 일부러 노래방 도우미를 불렀다. 무시와 조롱을 받는 기분이었다. 형태씨는 “ ‘왜 네가 남자를 좋아하는지 설득해보라’고 사람들은 요구하는데, 왜 내가 내 존재를 설득해야 하는 거지. 나는 그냥 있는 건데”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형태씨는 직장을 옮겨야 했다. 새로 옮긴 직장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주변에 얘기하지 않고 있다. 동료가 ‘여자친구가 왜 없느냐. 설마 남자 좋아하는 건 아니지’라며 농을 건넬 때마다 ‘저는 동성애자인데, 그런 말 말아주세요’라고 속으로만 되뇐다. 입 밖으로 꺼냈다가 해고를 당하거나 연봉이 깎일지도 모를 것 같아서다.
표현하지 못할 답답함과 조롱 속에서 스물아홉 해를 보내던 그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은 동성애자를 다룬 영화 <종로의 기적>을 보면서부터다. 그는 이 영화를 13번이나 봤다. ‘내가 받는 고통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이제 더 이상 어떤 사람인 척하며 살아가는 것 말고 진짜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희망에 찬 눈물이 솟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고백했고, 어머니는 그를 인정했다. 언젠가는 아버지에게도 털어놓을 생각이다. 형태씨는 “나답게 살고 싶어서 성소수자 단체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면서 “ ‘네가 동성애자건 말건 상관 안 할 테니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숨죽이고 살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차별적인 태도와 싸워 나가는 것이 내 존재를 인정받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힘이 돼주는 사람들도 있다. 한 성공회 신부가 운영하는 교회는 그가 동성애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지지한다. 그는 이 교회에서 동성애 혐오론자에 대한 미움을 치유한다. 그의 친구들은 “네가 ‘아웃팅’(본인은 원치 않는데 제3자에 의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폭로돼 비난받는 상황) 당하면, 우리가 함께 싸워줄게”라며 그를 응원한다.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보수적인 연애관을 가진 형태씨는 요즘 1년 가까이 사귄 애인과의 미래를 상상한다. ‘만약 결혼하면 어떤 일상을 누리게 될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하지만 이 꿈들이 현실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형태씨는 “지금 꾸는 꿈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지금 내가 살아 숨쉬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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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는 죄’라고 믿던 모태신앙자 김별샘씨가 생각을 바꾼 이유
ㆍ철거민 농성장서 만난 동성애자 불쾌하다는 편견 깨트려줘
ㆍ“그를 아프게 한 사람이 바로 나 있는 그대로의 그들 인정해야”
김별샘씨(24·사진)의 삶은 기독교적이다.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교회 집사인 부모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다. 기독교 대안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학 전공도 기독교 철학이다. 학교 친구보다 교회 친구가 많은 그는 “일요일에 교회를 안 간 날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동성애 등 성소수자에 대한 생각 역시 보수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았다. ‘동성애자는 죄인이다. 빨리 죄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고 싶었다. 2011년 12월 앰네스티 한국지부 대학생 네트워크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이성애 중심의 표준어를 바꾸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애인’이라는 단어의 국어사전 뜻을 ‘이성 간의 사랑하는 사람’에서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등의 일이었다.
김씨는 캠페인에 동참은 했지만 동성애에 대한 생각은 동료들과 달랐다. 그는 “동성애자의 인권은 보호해야 하지만 동성애는 죄악이다”라고 말했다가 동료들로부터 “너의 발언이 곧 차별”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김씨는 “사람을 돕겠다고 나선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나. 솔직히 ‘멘붕’이었다”고 회고했다. 동성애를 보는 김씨의 시각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씨가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안 부모는 “네가 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보느냐. 인권운동은 반대하지 않겠지만 죄를 조장해선 안된다”고 걱정했다. 동생도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면 세상은 곧 말세가 된다”며 우려했다. 김씨는 ‘내가 무슨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차별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조금 덜 힘들게 하자는 것뿐인데, 이게 정말 잘못된 생각일까’라는 의구심에 빠졌다.
친구들도 그를 몰아붙였다. 어린시절부터 친했던 교회 친구들은 ‘차별금지법 입법 반대’ 서명을 받고 다녔다. 이들은 “차별은 부당하다. 하지만 동성애는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할 수 있다”고 김씨를 설득했다. 고등학교 친구는 그의 페이스북에 ‘너는 동성애를 고치도록 권장하지 못할망정, 왜 죄를 부추기냐’는 질타의 글을 남겼다. 순식간에 비슷한 댓글 60여개가 이어졌다. 김씨는 “ ‘내가 잘못하는 걸까. 신이 나를 벌하시는 걸까’라는 생각에 두려웠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지난해 7월. 그는 북아현동의 철거민 농성장을 우연히 찾았다. 그곳에서 철거민들의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온 동성애자 친구를 만났다. 김씨는 “영화에서나 봤던 동성애자를 처음 봤다. 충격적이었다”면서 “하지만 불쾌감은 전혀 없었다. 알고보니 나는 이성을 좋아하고 그 친구는 동성을 좋아하는 것만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동성애자 친구는 김씨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털어놨다. 성적 지향을 확인하면서 괴로워했던 일과 이후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겪었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들었다. 남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를 탓하며, 숨죽인 채 살아왔던 그의 고통에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이 친구를 아프게 한 사람이 바로 나였구나’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생각이 쉽게 정리되진 않았다. 김씨는 스스로 수많은 질문과 대답을 반복했다. 그는 결국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어떤 모습이든지 똑같이 사랑하겠구나. 신의 계획으로 이들을 만들었다면, 내가 무슨 근거로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소수자를 인정하게 됐다.
생각의 혼란은 가셨지만, 부모와 친구들과의 간극은 여전하다. 김씨는 “그들이 쉽게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지만, 적어도 약자를 사랑했던 예수의 뜻을 돌이켜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치료해야 한다는 식의 동정 어린 시선이 아닌, 있는 그대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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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기독교계, 차별금지법 번번이 주저앉혀
“소수 동성애자와 1200만 신도 중 선택하라”
지난 4월 민주당 김한길·최원식 의원은 같은 당 소속 의원 51명과 발의한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자진 철회했다. 차별금지법은 임신 또는 출산, 종교, 성적지향, 성적정체성, 정치적 의견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수 기독교·시민단체는 ‘성적지향’과 ‘성정체성’ 등의 내용이 독소조항이라며 강력하게 반대운동을 벌였다. ‘차별금지법반대 국민연대’ 등은 홈페이지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카카오톡 등을 통해 차별금지법 발의에 참여한 의원 명단을 공유했다. 이들 의원실에는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보수 기독교계가 동성애에 반대하는 입장은 확고하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홍재철 대표회장은 지난 14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주당은 소수의 동성애자와 1200만 성도의 기독교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라며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1200만 성도들이 국회 앞에서 시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발은 이번만이 아니다. 2007년 10월 법무부가 성적지향을 차별금지 사유로 포함한 차별금지법안을 입법예고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기총,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국가조찬기도회 등으로 구성된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안 저지 의회선교연합’ 등은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웬 말이냐”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법무부는 차별금지 사유 중 ‘병력·학력·성적지향·가족형태’ 등 총 7개 항목이 삭제된 법안을 상정시켰다. 이 법안은 이듬해 국회 임기만료로 자연사했다.
보수 기독교계의 동성애 반대에 대해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목사는 “ ‘종북게이’ 등의 구호가 난무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며 “보수 기독교계와 인적·물적 자원이 겹치는 보수 진영이 동성애 혐오증을 이용해 보수 교회의 세력을 유지하고, 보수 정치권의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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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격려·무시… 동성애를 보는 시선들… 이성애자 곽희양 기자 ‘동성애 1인 시위’ 체험기
ㆍ교회 앞에선 ‘밀쳐내고’ 일부 시민은 ‘격려하고’… 극과 극 반응
경향신문 곽희양 기자입니다. 서울시내 3곳에서 최근 손팻말을 들고 2~3시간씩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손팻말에는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동성애자도 여러분과 똑같이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문구를 넣었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다양한 시선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경향신문은 이성애자인 경향신문 기자가 동성애자로 자처하면서 시위를 하는 것이 문제는 없는지 성소수자 단체 4곳에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들은 “몇 시간 동안의 시위로 실제 성소수자가 느끼는 차별을 경험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고 당부했습니다.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입니다. 동성애자 차별금지 등의 항목을 담은 차별금지법은 국회에서 입법이 철회됐습니다.
■“우리 교회 앞에서 하지 마라”(5일 중구 한 대형 교회 앞)
일요일. 손팻말을 들자 한 60대 남성이 다가왔다. 그는 “뭐라고 썼어. 뭐라고 썼느냐고. 경찰에 신고할 거야”라고 윽박질렀다. 몇몇 교인은 “동성애? 쳇”이라며 비웃음을 남겼다. 교회 관계자가 나를 정문 밖으로 밀어냈다. 정문에서 7~8m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교인 수백명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7~8명의 교인이 “왜 우리 교회 앞이냐. 다른 곳에서 하라”고 쏘아붙였다. ‘자원봉사부’라고 쓰인 조끼를 입은 교인은 내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어느 누가 동성연애를 좋아해. 지 어미도 아들 낳았다고 미역국 먹었겠지. 부모님 가슴에 못박는 일이라고.” 그러자 다른 교인이 “부모 생각하겠어요. 내비둬요, 어휴”라고 했다.
‘이성애자’ 경향신문 곽희양 기자가 지난 5일 서울 중구 한 대형 교회 앞에서 동성애자 차별에 반대하는 1인 시위 체험을 하다가 교회 관계자의 제지를 받고 있다(왼쪽 사진). 9일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는 한 여성의 격려를 받았다. | 서성일·김기남 기자 centing@kyunghyang.com
부드러운 말로 나를 설득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50대 여성은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왜 (동성애를) 반대하는 줄 알 테니까”라고 말했다. 50대 남성은 “사랑하는 차원에서 모두 귀한 자녀지만, 우리는 성경의 음과 양의 창조원리를 근거로 하는 모임이다.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말했다.
교인들은 서로 안부를 건네고 웃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행복’으로 들렸다. 성소수자들이 평생 이와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어렴풋이 추측했다.
■“저 진짜 이해하거든요”(7일 합정역 사거리)
합정역 사거리는 ‘마포구레인보우연대’라는 성소수자 단체가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입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려다 마포구청의 불허로 좌절된 곳이다. 많은 시민들이 빠른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며 피켓을 쳐다보다 나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에게 위협적인 말을 건네는 사람은 없었다. 한 30대 여성이 나를 보며 “파이팅” 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도 웃음으로 답했다. 처음으로 느낀 환대다. 1시간쯤 지나자 20대 여성이 길을 가다 돌아섰다. 그는 “제 친구도 동성애자거든요. 저 진짜 이해하거든요”라고 어렵게 말을 건넸다. 코끝이 찡해졌다. 또 다른 20대 여성은 “고생이 많으세요. 힘내세요”라며 비닐봉지를 건넸다. 안에는 음료와 빵이 들어 있었다. ‘그래도 내 편은 있구나’라는 위로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날 피켓을 보고 지나간 200~300명 중 나에게 반응을 보인 이는 딱 3명이었다.
대부분 무관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구청 측이 나에게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20여분이 지나자 20대 여성이 다가왔다. 그는 “드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라며 호두만주와 따뜻한 커피를 건넸다. 커피를 건네받은 손보다 가슴이 더 따뜻해졌다. 고맙다는 말에 “힘내시라”는 응원이 돌아왔다. 30대 여성도 우산을 접으며 “파이팅” 하며 웃어보였다. 전화통화를 하며 지나던 남성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양복 차림에 모자를 쓴 60대로 보이는 남성이 피켓을 한참 바라봤다. 그는 “프랑스는 그거(동성결혼) 허용했잖아. 근데 꼭 그렇게까지 (동성애를) 하려고 해”라고 물었다. 그는 ‘동성애를 나쁘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에이, 아니야”라고 답하고 지나갔다. 50대로 보이는 남성도 “외국에서는 허용했잖아”라고 말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던 장애인 남성이 손팻말을 바라보며 “그거 안 좋아요. 안 좋아요”라고 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다. 1인 시위 3일간 많은 사람들이 보인 태도는 대부분 무관심이다. 일부는 경멸하거나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소수자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몇몇 시민들의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 성적 지향 = 남성, 여성 또는 양성에 대한 지속적인 감정적, 애정적, 성적 끌림 또는 이를 기반한 개인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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