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는 낙오자가 아니다…덜 벌고 더 행복한 ‘나만의 스타일’일 뿐
모자라고 불편하게 살기]유쾌하고 즐겁게 결핍을 선택하는 사람들
21세기 한국 사회는 풍요롭고 빠르다. 생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빈곤층이 아직 존재하지만 과거에 비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빈곤 대신 나타난 ‘적’은 늘어진 뱃살과 체지방이다. 사람들은 ‘슈퍼 디럭스’로도 모자라 ‘울트라 슈퍼 디럭스’하게 커진 가전제품을 들여놓을 더 큰 집을 장만하느라 동분서주한다. 이런 현대인의 초상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리직톤’을 떠올리게 한다. 에리직톤은 곡물의 여신을 분노케 한 죄로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받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우고, 딸을 팔아 먹을 것을 구해 계속 먹었다. 에리직톤은 마침내 자신의 몸을 뜯어먹었지만 배고픔을 떨쳐내지 못했다고 신화는 적고 있다.
그런데 제한없는 풍요와 속도가 현기증을 불러온 것일까. 에리직톤의 후예들 사이에서 스스로 ‘결핍’과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남들은 삶을 편리하게 해준다며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크고 작은 생활도구들을 자신의 삶에서 퇴장시키는가 하면, 스스로 실직을 선택하는 사람들까지 나온다. 청빈한 삶에 대한 염원이나 귀농행렬은 일찍부터 존재했지만 그들은 온 존재를 걸듯 엄숙하고 결연했다. 지금은 그들보다 훨씬 가볍고 유쾌하게 자발적 결핍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 20년 다닌 직장을 그만뒀다 ‘가난한’ 행복공동체에서 새 삶
▲ 인터넷과 청소기를 없앴다 좀 불편해도 생활의 여유 솔솔
▲ 덜 일하는 대신 시간을 얻었다 ‘욕망의 쳇바퀴’는 이제 그만
■ 텔레비전을 내던져버린 사람들
맞벌이 주부 백윤정씨(39)가 텔레비전을 없앤 것은 3년 전 친정부모 집에서 분가할 때다. 정확히는 유선방송을 달지 않았고, 방송을 전혀 보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가끔 DVD를 보거나 게임을 할 때만 쓴다. 아이를 둔 여느 맞벌이 부부와 마찬가지로 백씨 부부는 텔레비전 때문에 적잖이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아이가 텔레비전에 너무 빠질까봐 걱정했고, 퇴근 후 부부는 텔레비전에 눈을 박고 있으면서 대화가 부족해졌다고 느꼈다.
텔레비전을 없애자 이런 스트레스가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백씨의 아들은 집에 오면 시키지 않아도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꺼내오고, 백씨 부부는 밤이면 차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백씨는 집에 인터넷도 연결하지 않았다. 백씨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 애가 혹시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직까지 그런 기색은 없다”며 “나도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필요한 정보들을 얻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사회적기업 에듀머니의 제윤경 대표는 텔레비전뿐 아니라 정수기, 전자레인지, 청소기 등도 없앴다. 제 대표는 “조금만 불편을 감수하면 그것이 다른 즐거움을 주더라”고 말했다. 청소기를 쓸 때는 늘 쫓기듯 청소했지만 청소기를 없애니 여유롭게 청소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침대를 없앴더니 매일 아침 이불을 개고 털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텔레비전을 없앴더니 정말 많은 여유 시간이 생겼단다. 제 대표는 자발적 결핍을 경제교육의 일환으로도 활용한다. 그는 아이와 함께 석 달에 한 번 일주일 동안 ‘돈 안 쓰고 살아보기’를 실천하고 있다. 제 대표는 “아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심리학자 김태형씨(47)는 스마트폰을 거부하고 7년째 쓰고 있는 구식 휴대폰을 계속 들고 다닌다. 아이들은 “아빠는 왜 스마트폰을 사지 않아”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보기에 옳지 않은 방향으로 휩쓸려가는 유행을 거부하고 반대한다는 의미로 일종의 ‘소극적 저항’을 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쓰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남 따라하기, 즉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심리”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스마트폰을 안 쓰는 것은 그런 세태에 영합하지 않고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텔레비전을 치운 자리에 아이들 책장을 장식한 어느 가정의 거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욕망을 버리고 삶의 비전을 풍요롭게 하기
왜 스스로 결핍이나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그들은 버리고 비우는 대신 무엇을 얻는가. 전문가들은 ‘저성장 고위험’ 시대에 접어든 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성하는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고 본다. 에리직톤의 허기가 원래부터 채워질 수 없었던 것처럼 소비를 늘린다한들 행복이 그만큼 커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나는 자가운전을 하지 않는데, 재밌게도 주변에 보면 아이 학원에 보내지 않기, 명품 사지 않기, 공정무역 제품 쓰기 등 소박하지만 자발적 불편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힐링 열풍과 자발적 결핍을 대비시켰다. 성장과 경쟁 일변도의 패러다임은 낙오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힐링은 이런 경쟁 시스템에 계속 남아 있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자발적 결핍이나 자발적 불편은 경쟁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역발상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자발적 결핍이나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경쟁 시스템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시스템의 문제점을 인지하고 효율성 중심의 체제를 깨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는 20여년간 다녔던 신문사를 3년 전 그만뒀다. 그는 “폭력적인 사회에서 자유롭게 살려면 가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초엔 강원도 홍천에 마련해둔 땅을 일구는 농부로 살고자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서 공부공동체를 꾸려 ‘행복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가난하게 살면 되지”라면서 직장을 그만뒀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고 말했다. 맞벌이 부부 가운데 한 명이 그만뒀으니 수입이 절반 이하로 깎이는 것은 당연한 일. 당장 씀씀이가 줄어들었다. 스트레스 핑계를 대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시던 술을 끊었고 중고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닌다. 정신이 맑아졌고 몸이 건강해졌다. 이제는 담배를 끊어볼 생각이다.
김씨는 “전부터 대안학교 선생님들을 유심히 봤는데 그분들 월급이 100만원 정도”라면서 “생활을 거기에 맞추니까 어려운 가운데서도 삶의 질은 몇 배 더 버는 사람들보다 높은 것을 봤다”고 말했다. 그는 “사표를 쓰면서 막연하게 겁을 냈는데 그렇게 겁낼 일은 아닌 것 같다”면서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참 많고 오히려 돈 들여서 하는 것보다 만족감이 더 큰 일도 많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로부터의 ‘퇴장’으로 묘사되는 것에는 반대했다. 물질적·세속적인 욕망에서는 퇴장이지만 제대로 된 삶을 위해서는 ‘등장’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내 생각에 어긋나는 글을 쓰면서 돈 몇 푼 버는 것보다 지금의 내가 돈을 못 벌지만 훨씬 더 좋은 삶을 살고 있고, 사회에도 제대로 참여하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자발적 결핍을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경쟁의 룰에 회의를 품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신자유주의 이후 사람들은 안정적인 좋은 직장에 다니고 높은 소득을 올린다 해도 노동시장이 유연화되면서 끊임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자발적 결핍은 ‘신자유주의 게임의 룰’에 회의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택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2012년의 주목할 만한 트렌드의 하나로 ‘스위치를 끄다’를 지목했던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는 ‘행복’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했다. “그동안의 성장지향적·성취지향적인 사회에서 이제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화두에 진정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너무 빠른 것, 너무 많은 것이 곧 행복이라는 등식이 깨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시간은 유한한데 돈은 아무리 벌어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의 후지무라 야스유키 박사의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라는 책에 시간은 유한한데 인간은 끊임없이 돈을 버느라 시간을 다 써버리고 죽는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소개했다. 그는 “책은 하루나 이틀만 일해서 돈을 적게 버는 대신 시간을 벌어서 애기도 키우고 자발적인 활동을 하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걸 알아차린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성관씨(44)는 1990년대에 잠깐 대기업을 다니다 그만둔 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은 채 공부하고, 강의하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박씨는 예기치 않은 일들을 만들고 끊임없이 뭔가를 확인하게 만드는 휴대전화를 없앴고, 빚을 지는 시스템을 일상화시킨다고 판단해 신용카드도 쓰지 않는다. 텔레비전도 없앴고, 올해 안으로 인터넷도 끊을 생각이다. 그렇지만 박씨는 “가난을 낭만화해서는 안되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할 생각도 전혀 없다”면서 “다만 생활을 간소화하고 무의식중에 시간과 돈을 쓰는 생활 패턴을 바꾸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2,소설가 김형경씨 “채식 시작한 지 5년, 마음의 병 사라지고 건강해졌어요
모자라고 불편하게 살기]채식하는 사람들
소설가 김형경씨(52)의 식탁은 늘 채소와 과일, 곡물로만 이루어진다. 고기는 물론이고 생선과 우유, 달걀도 입에 대지 않는다. 이렇게 먹은 지 5년째다. 지난 2일 오후 1시30분 서울역사박물관 내 모던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만났을 때도 그가 점심 메뉴로 주문한 것은 두부스테이크와 견과류로 토핑한 호박 수프였다. 호박 수프에 우유를 넣지 말아달라는 주문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채식을 한다고 하면 흔히 동물 보호나 환경운동과 같은 어떤 주의나 주장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오직 건강을 위해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형경씨가 지난 2일 서울역사박물관에 있는 모던 한식 레스토랑 ‘콩두’에서 두부스테이크와 샐러드, 호박 수프가 차려진 식탁을 보며 웃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3,TV 없애고 자전거 통학, 스마트폰 버리니 새 세상이 열렸다 모자라고 불편하게 살기]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사람들 - 고양 ‘빛과소금교회’ 자발적인 불편을 감수하면서 생활하는 경기 고양시 빛과소금교회의 신자들이 지난달 29일 추석을 앞두고 독거 노인들을 보살피기 위해 교회를 찾았다가 밝은 표정으로 촬영에 응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4,휴대폰 100일 안 쓴 중학생 “약속 신중히 하고 저절로 메모 습관” 모자라고 불편하게 살기]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사람들 이래선 안되겠다고 느낄 무렵, 때마침 TV를 통해 ‘아미시 프로젝트’를 알게 됐다. 미국의 한 평범한 대학생이 모든 SNS에서 탈퇴한 후 1년 동안 휴대폰 안 쓰기에 도전한 것이다. ‘나도 한번 해보자’란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꺼서 서랍 깊숙이 넣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일상의 변화를 블로그 일기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5,가수 장필순씨 “제주 ‘외딴집’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자연의 속도로 살아요
▲ “채식한다고 모두가 동물보호·환경주의자 아냐 까다롭게 행동하기 싫어서 모임선 먹을 수 있는 것만 먹어
채식은 개인의 자유… 다른 이에게 권유 안해”
-채식을 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예전에 밖에서 음식을 사먹으면 자주 탈이 났어요. 그때는 화학조미료를 많이 넣었거나 청결하지 않아서인가보다라고 짐작했죠. 그러다가 2007년 1월 심신통합요가치료를 공부하는 친구들을 따라서 인도로 2주간의 요가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어요. 첫 방문지는 오르빌 요가공동체였는데 도착한 첫날 새벽 아침식사를 하러 갔을 때 야외 식당에 차려진 음식은 빵, 커피, 익힌 채소 몇 종류가 전부였어요. 제가 ‘달걀이나 우유는 없어요?’ 했더니 다들 이상한 눈으로 저를 보더라고요. 그곳 사람들은 물론, 함께 간 여행친구들 모두 채식주의자였던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채식을 한 후부터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채식을 바로 시작한 건가요.
“아뇨. 채식을 하면서 2주 만에 체중이 4㎏ 줄고 체형이 20대로 돌아갔을 정도로 몸이 굉장히 좋아졌지만 지혜가 부족해 경험이 주는 교훈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채식이 아니라 요가학교에서 기관지 천식을 고치는 방법을 배운 덕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곱창구이를 즐길 만큼 육식을 좋아했던 터라 귀국하자마자 추어탕집으로 달려갔죠. 그렇게 예전의 패턴으로 돌아가면서 몸이 불편해지는 증상도 되풀이됐어요. 사람을 만나면 상대방의 감정이나 병증까지 옮는 투사적 동일시 증상도 동반됐죠. 그러면서 정신적 무력감, 우울증 증상이 왔어요. 그래서 정신분석을 받게 됐는데 그즈음 우연히 <오대산 노스님의 인과 이야기>를 읽고 채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어요.”
중국 번역서인 <오대산 노스님의 인과 이야기>는 중국 오대산에서 수행한 묘법 스님의 중생 교화 기록을 담은 것이다. 묘법 스님은 문화혁명 때 공산당 정권의 불교 파괴 정책을 피해 오대산 깊숙이 들어간 후 그곳에서 30년간 폐관 수행을 하다가 중국이 개혁·개방된 후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교화했다. 김씨는 “법문이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노스님 앞에 모여들었는데 개인에게 주는 해법은 저마다 달랐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게 처방한 게 육식을 철저히 금하라는 것이었다”며 “인도여행의 기억이 겹치면서 혹시 내가 음식 먹고 자주 탈이 나는 게 육식 때문인가 하는 의심을 그때 처음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날부터 한 달간 혼자 시험해봤어요. 육식이나 회를 먹은 날과 안 먹은 날 제 몸의 상태가 어떻게 다른지, 우유나 달걀 또는 멸치 우려낸 물은 어떤지 등을 두루 비교하며 체험했죠. 그러고서 내린 결론은 ‘육식과 해산물은 물론이고 달걀, 유제품까지 완전히 끊자’였어요. 2007년 10월의 일이에요.”
-매끼 채식만 하면 맛이 있나요.
“초기엔 채식을 하더라도 맛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다양한 채식 레시피를 공부했어요. 불자니까 절에서 사용하는 표고버섯가루나 들깻가루를 음식 조미료로 사용하고 샐러드를 먹을 땐 발사믹식초를 이용한 소스를 뿌렸죠. 그런데 점점 입맛이 단순하고 검박해지면서 2~3년쯤 지나니까 발사믹소스의 새콤달콤짭짤한 맛도 자극적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지금은 어떤 것도 가미하거나 조리하지 않은 원재료 그대로 먹는 걸 좋아해요.”
-단백질 등을 섭취하지 않으면 영양이 결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채식을 하는 서양 남자들의 등뼈가 굽어 있는 것을 외국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어요. 채식만 하다가 칼슘이 부족해 뼈가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되더라고요. 그때 한의사인 후배가 권해준 식품이 마늘이에요. 한방에선 마늘이 인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인 뼈와 살과 피를 만드는 유일 식품이라고 한대요. 뉴욕타임스에서도 마늘을 건강에 좋은 최고의 식물로 꼽았잖아요. 아침저녁으로 뚝배기 속에 돌을 깔고 통째로 2통씩 구워 먹으라고 해서 따르고 있어요. 또 열량과 단백질이 풍부한 견과류와 고기 못지않은 단백질을 함유한 콩도 자주 먹죠. 종합비타민과 오메가3, 토코페롤도 건강보조식품으로 챙겨 먹고요. 제가 동물 보호 차원에서 채식하는 줄로 오해하신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육식보다 네가 들고 다니는 가죽가방과 오메가3가 더 끔찍하다’고요(웃음).”
여행할 때 그가 필수적으로 챙기는 식품은 마늘환과 쑥환, 미숫가루 선식이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으로 환생했다는 단군신화도 있잖아요. 기력이 달릴 수 있는 타지에선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에요.”
-채식의 효과는 많이 봤나요.
“몇 년 만에 만난 분들이 제게 보이는 첫 반응은 ‘얼굴이 맑아졌다’예요. 그만큼 건강해지고 머리도 맑아져 총명해진 느낌이에요.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병증을 옮아 심하게 앓는 일도 서서히 사라졌죠. 채식 후 3년쯤 지나니까 육식을 했을 때의 탁한 느낌도 다 없어졌어요.”
-다른 사람들과 외식을 할 때는 먹는 취향이 달라 불편할 것 같아요.
“김치엔 젓갈, 국이나 된장찌개엔 멸치의 흔적이 숨어 있잖아요. 외식할 때 그 정도는 못본 척하고 먹어요. 코스요리집에서 모임을 할 땐 주문받는 분께 제 것은 야채요리만 따로 한 접시 준비해달라고 하고, 삼겹살집에선 오이·상추같이 제가 먹을 수 있는 것만 조용히 먹어요. 까다롭게 행동하고 싶지 않거든요.”
<사람 풍경> <천 개의 공감> <좋은 이별>에 이어 얼마 전 4번째 심리에세이 <만가지 행동>을 펴낸 김씨는 요즘 장편소설을 집필 중이다. 집필활동은 아침 6시부터 정오까지 하는데 이때 두유와 구운 마늘, 사과 하나 정도를 먹는다. 또 점심식사는 외출해서 사람들과 함께하고, 저녁식사는 집에서 감자·고구마·당근·연근 등 뿌리야채와 과일을 익혀서 먹는다. 그런 그에게 채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권유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전혀 없다”였다. 뭘 하든, 뭘 먹든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란다.
채식주의자(vegetarian)는 육식을 피하고 식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만을 먹는 사람을 가리킨다. 세계채식연맹(IVU)에서는 채식주의자를 ‘육지동물은 물론 바다나 강에 사는 물고기도 먹지 않는 사람들. 단, 우유나 계란은 취향대로 섭취할 수 있고 안 할 수도 있다’고 정의하고 있지만, 뭘 먹고 먹지 않느냐에 따라 채식주의도 여러 유형으로 구분된다. △육류 중 쇠고기·돼지고기 등 붉은 고기류는 먹지 않고 닭·오리고기 등 가금류는 섭취하는 ‘세미 베지테리언(semi-vegetarian)’ △육류는 먹지 않지만 물고기와 동물의 알, 유제품은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pesco-vegetarian)’ △육식은 하지 않으나 유제품과 동물의 알은 먹는 ‘락토-오보-베지테리언(lacto-ovo-vegetarian)’ △육류와 동물의 알은 먹지 않고 우유·유제품만 먹는 ‘락토 베지테리언(lacto-vegetarian)’ △육류와 생선은 물론 우유와 동물의 알, 꿀도 먹지 않고 가죽제품도 사용하지 않는 ‘베건(vegan)’의 순으로 점점 엄격해진다. 베건 중에는 식물에 피해를 주는 잎·줄기·뿌리 부위는 먹지 않고 열매만 섭취하는 ‘푸루테리언(fruitarian)’과 같은 극단적 채식주의자도 있다.
노벨상 수상자로는 R 타고르(1913년 문학상),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년 물리학상), 조지 버너드 쇼(1925년 문학상), C 벤카타 라만(1930년 물리학상), 알베르트 슈바이처(1952년 평화상), 라이너스 N 폴링(1954년 화학상, 1962년 평화상), 조지 월드(1967년 생리의학상), 아이작 B 싱어(1978년 문학상), C 수브라마니안(1983년 물리학상), 엘리 비젤(1986년 평화상), 제14대 달라이 라마(1989년 평화상), 아웅산 수치(1991년 평화상) 등이 채식주의자였다.
경기 고양시에 있는 ‘빛과소금교회’ 사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스스로와의 약속을 실행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시작한 ‘자발적 불편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텀블러 이용하기, 장바구니 사용하기, 에스컬레이터 이용하지 않기, 자전거 타고 통학하기, TV 덜 보기 등 모두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아이디어들이다. 무절제한 소비, 빠름과 효율에만 익숙해진 우리의 생활 습관을 돌아보자는 취지다.
대학원생인 박종오씨(28)는 지난 4월부터 자전거로 통학을 하고 있다. 인천에 있는 집에서 그가 다니는 숭실대까지는 왕복 3시간이 걸린다. 힘껏 페달을 밟아 숭실대 입구의 마지막 언덕길까지 힘겹게 오르고 나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자전거를 주차해 놓은 후 그는 다시 1층 로비의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조교실까지 계단을 이용해 올라간다.
“어휴, 힘들죠.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는 아침 7시30분에 집을 나섰는데 자전거를 이용하면서부터는 6시30분으로 한 시간 앞당겼어요. 세 시간밖에 못 자고 피곤한 날에는 자전거를 그냥 놓고 갈까하는 유혹이 들기도 해요.”
▲ 인천~서울 자전거 통학생 “지옥철에 안 시달리고 건강”
뚜껑 달린 컵·장바구니 쓰기 등 습관 돌아보는 ‘작은 실천’
그가 자전거를 택한 이유는 ‘닦달하는 삶’이 싫기 때문이다. 아침 출근시간대의 ‘지옥철’을 타 본 사람은 안다. 남보다 먼저 차량에 오르기 위해선 앞사람을 밀어야 하고, 에스컬레이터에 조금이라도 먼저 타기 위해선 남의 발을 밟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
“언제부턴가 그냥 그런 풍경이 싫더라고요. 잠을 조금 줄이더라도, 몸이 조금 피곤하더라도 내 두 발로 페달을 밟아 내가 낼 수 있는 속력만큼으로만 앞으로 달리는 게 좋아졌어요. 운동도 되고 일석이조잖아요?”
박씨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권혜영씨(32)가 ‘독한 청년’이라고 놀리며 웃었다. 그런 권씨는 결혼할 때 혼수 목록에서 아예 TV를 빼버린 주인공이다. 그의 신혼집 거실에는 TV가 있어야 할 자리에 책장이 놓여있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도 친정집에서 드라마나 오락프로그램을 즐겨 보곤 했다. “어느날 엄마와 함께 새로 시작한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엄마가 첫회를 딱 보더니 앞으로 벌어질 스토리를 줄줄 읊어대시더라고요. 하도 비슷한 패턴이니 안 봐도 아는 거죠. 안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을 왜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TV 앞에 앉으면 뭐에 홀린 듯 훌쩍 가버리는 두세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죠.”
그의 남편도 신혼집에 TV를 들이지 말자는 아내의 의견에 적극 동의했다. 이들 부부는 퇴근 후 2~3시간 동안 나란히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조용히 책을 읽는다. 좋은 구절을 발견하면 ‘한번 읽어 보라’며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가끔 회사 동료들이 <개그콘서트> 이야기를 하며 깔깔 대고 웃을 때 무슨 내용인지 몰라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요샌 TV도 진화해서 이젠 넋놓고 바라보는 바보상자가 아니라 시청자와 상호작용하는 ‘인터랙티브 프로그램’을 지향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인터랙티브라는 것도 사실 시청자가 답을 ‘3번’이라고 맞히면 즉각 ‘그게 아니라 4번이에요’라고 알려주는 식과 다를 바 없잖아요. 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자 책을 읽고 스스로 고민해서 답을 찾는 과정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런가하면 김윤진씨(40)는 아직도 폴더폰을 쓰고 있다. 처음 스마트폰이 나왔을 때는 ‘한번 써볼까’하는 호기심도 없지 않았지만, 딸 아이가 아이팟에 빠져 가족과 함께 있을 때도 하루종일 아이팟만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는 ‘스마트 기기는 중독성이 강한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에게는 빠른 인터넷 속도나 고화질의 액정을 자랑하는 스마트폰의 기능이 별 필요가 없다. 서울영농학교 교사인 그는 직업 특성상 흙을 만져야 하기 때문에 비싼 스마트폰보다 오히려 폴더폰이 더 편하다.
“저처럼 스마트폰이 굳이 필요없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요새는 하루가 멀다하고 스마트폰 최신버전만 나오다보니 폴더폰을 파는 데가 없더라고요. 지난해 줄곧 써오던 폴더폰이 고장나서 애를 먹었어요. 인터넷을 뒤져 중고폰으로 겨우 구입할 수 있었죠.”
간혹 스마트폰에 있는 내비게이션 성능이나 인터넷 검색 기능이 아쉬울 때도 있다. “그럴 땐 주변 사람들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금세 해결돼요. 그 김에 서로 안부도 묻고 좋잖아요.”
기윤실 정직운동윤리본부장이기도 한 이 교회 신동식 목사는 “ ‘자발적 불편운동’은 TV와 휴대폰을 모두 없애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살자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요즘 세상이 너무 속도전으로 변해가다 보니 우리 몸이 못 따라갈 정도”라며 “조금 불편해지면 오히려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 작은 삶의 지혜가 생긴다. 환경도 보호하고 건강도 좋아지고 모두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부터 휴대폰 안 쓰기 프로젝트에 도전한다. 앞으로 100일 동안 휴대폰 없이 지내는 매일의 경험담을 최대한 빠지지 않고 블로그에 올리겠다.’
지난 3월 중학교 3학년인 박정민군(15)은 휴대폰 없이 살아보겠다고 선언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심이었다.
“SNS는 우리에게 학교생활의 연장선이에요. ‘틱톡’이라는 스마트폰 채팅 애플리케이션이 있는데, 우리끼리 모임방을 만들어 거기다 사진과 글을 올려요. 그런데 너무 빠지다 보니까 ‘틱톡에서 누가 내 흉을 보지는 않을까’ ‘누가 내 사진을 막 올리면 어떡하지’ 괜히 불안해져서 수시로 체크를 하게 되더라고요.”
프로젝트 2일째=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일산에서 서울까지 통학거리가 길어 보통 아빠의 퇴근시간에 맞춰 자가용으로 하교했지만 휴대폰이 없으니 연락이 쉽지 않았다. 혼자 집까지 돌아오는 경로를 탐색하면서 모험 같은 스릴을 느꼈다. 지하철을 타니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카톡 대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다.
5일째= 이제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휴대폰 대신 공중전화를 이용하기 위해 100원짜리 다섯 개를 호주머니에 챙기는 습관이 생겼다. 커다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서 빼고 나니 먼저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7일째= 부모님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다가 ‘거리에 공중전화가 이렇게나 없었나?’ 깜짝 놀랐다. 결국 한 아저씨의 휴대폰을 빌려쓰고야 말았다. 반성한다.
50일째= 동아리 친구가 ‘그만 하면 됐다.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니 휴대폰 좀 살리라’고 독촉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휴대폰 없이 사는 것은 ‘조금 불편해질 뿐’ 생각보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알고 보면 시급한 일도 아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유선 전화로 통화해도 될 일이었다. 친구들도 조금씩 나의 생활에 맞춰주기 시작했다.
79일째=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휴대폰을 바꾸러 간 아빠를 따라갔다가 신상품의 유혹에 넘어갈 뻔한 것이다. 프로젝트 중이라며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최신 성능을 자랑하는 휴대폰이 머릿속에서 계속 아른거린다.
92일째=내가 좀 달라진 점들이 눈에 띈다. 먼저 계획을 잡을 때 조금 더 신중해졌다. 펑크를 내지 않기 위해 약속은 몇번씩 물어서 확실하게 했다. 장소와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해두는 습관도 생겼다. 휴대폰으로 쉽게 약속을 변경할 수 있던 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이다.
박군은 ‘휴대폰 안 쓰기 100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메모하는 습관을 얻은 것은 가장 큰 성과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중독성은 생각보다 복원력이 강했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그는 지금도 ‘틱톡’을 들여다보고 걸어다니면서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잊고 있던 예전 생활습관이 다시 나타나는 걸 볼 때마다 ‘아, 이럴 수가’ 싶어요. 고등학교에 가면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거나, 스마트폰을 아예 피처폰으로 바꿔버릴까 고민 중이에요. 한번 해봤으니 다음엔 더 쉽지 않을까요.”
7년 전 제주에 내려가 애월읍 산기슭 외딴집에서 살고 있는 가수 장필순씨. 최근 공연을 위해 경기 포천에서 만난 장씨는 느리게 사는 삶이 좋다고 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ㆍ[모자라고 불편하게 살기‘변방’에 은둔한 사람들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속도가 제 삶의 속도가 됐죠.”
가수 장필순(49)은 7년 전인 지난 2005년 7월 서울을 버리고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제주도의 서북쪽인 제주시 애월읍의 산기슭이었다. 반경 2㎞ 내에는 이웃이 없다. 20분을 걸어나가야 하루 두세 번 오는 버스를 잡아탈 수 있는 외진 곳이다.
6집까지 낸 그가 가수로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제주행을 택했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과 팬들은 그의 선택을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과 함께 7년을 살아오는 동안 그를 따라다니는 대중의 궁금증과 시선도 서서히 걷혔다. 그는 가끔 공연을 위해 뭍으로 오고 나머지는 집에서 보내는 완벽한 은둔생활을 한다. 그는 제주 생활에 아무런 후회와 불편이 없어보였다. 올해 말 7년 반 만의 앨범을 준비하는 장필순을, 그가 모처럼 공연을 하러 올라온 경기도 포천의 한 공연장에서 만났다.
- 사는 곳이 얼마나 외진 곳이길래 이웃도 없습니까.
“저녁이면 칠흑같이 깜깜해요. 길을 자주 다니던 저도 저녁에는 어두워서 길을 못 찾을 정도니까요. 가끔 저에게 다니러 오는 손님들이 있는데 거의 승용차를 몰고 오거나 아니면 콜택시를 불러서 와요. 워낙 외딴 곳에 살다 보니 택시를 타고 ‘애월읍의 외딴 집 데려다 주세요’하면 기사분들도 대부분 눈치를 채실 정도죠.”
- 그렇게 한적한 제주 집에서 특별히 하시는 게 있나요.
“1년에 공연을 위해서 네다섯 번 뭍으로 나오는 일을 제외하고는 제주에 있어요. 제주에 있을 때도 밖엔 잘 안 돌아다니고 집에만 있어요. 집에만 있어도 할 일이 충분히 많기 때문이죠. 개를 네 마리 키우는데 개들과 놀아줘야 하고 다른 일도 많아요. 친구들은 가끔 오지만 팬들의 방문은 정중히 사양하는 편이에요. 피할 수 없는 만남이겠다 싶은 경우와 편한 사람이 아니면 잘 안 만나죠.”
- 특별히 제주도를 택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유가 없진 않겠죠. 저를 아시는 분들은 내려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생각들을 바꿔보고 싶을 때가 가끔 있잖아요. 서울에서 태어나 토박이로 자랐지만 저도 모르게 이렇게 자연을 좋아하는 성향이 제게도 있었나봐요. 음악 작업을 하던 당시에도 휴식을 위해 주로 제주도를 찾곤 했었어요. 그냥 어느새 마음에 있던 곳이 제주였던 것 같아요.”
▲ “처음엔 먹고사는 게 막막했어요
사람 관계가 소중한 걸 느끼죠”
- 막상 농촌에서 살다 보면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도시의 삶에 비하면 반전이죠. 차이점이 많으니까요. 처음에는 먹고 싶은 걸 구하기 힘든 부분에서 차이를 느꼈어요. 하지만 그게 불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워낙 준비 없이 간 까닭에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준비했어요. 필요한 생활의 도구들이 바뀌더군요. 톱도 필요하고 망치도 필요하고, 마당이 있어서 쓸어낼 빗자루도 여러 개 필요하죠. 어려서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을 제외하면 흙을 밟을 일이 없었는데 여기 살면서 그런 옛기억들이 다시 재구성되는 느낌을 받아요.”
- 어떻게 바뀌었는데요.
“기상시간이 크게 바뀌었어요. 오전 6시에서 7시 사이에는 일어나는 것 같아요. 예전 음악작업을 하던 당시에는 밤을 모르고 지냈거든요. 새벽 3~4시에 잠이 든 적도 많았죠. 시간대가 거꾸로 흐른 거예요. 하지만 여기는 겨울에는 오후 4~5시, 여름에도 오후 7~8시면 해가 져요. 집 밖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렇다 보니 지구자체의 시간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게 돼요. 해가 뜨면 일어나서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와서 쉬는 과정이 반복되죠. 자연이 주는 신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계속돼요. 비오는 날은 밖에 나가지 않게 되고, 맑은 날은 그만큼 열심히 일하게 되고….”
- 새롭게 즐기게 된 취미도 많아졌을 것 같습니다.
“원래 내려왔을 때는 음악을 할 생각이 없었어요. 6집 정도 냈으니 이제 한적한 이곳에서 혼자 재밌게 살아볼 작정이었죠. 자연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까 아무래도 농사를 짓는 취미가 생겼죠. (웃음) 제주는 겨울이 짧아요. 그럴 때는 노는 밭에다 채소를 심었어요. 양배추, 브로콜리, 부추, 파, 배추, 고추, 가치, 호박, 깻잎, 상추…. 그야말로 다 먹기 위해 키우는 것들이었어요. 쌀은 농사짓기가 힘드니까 못하고 부식은 다 키워서 먹고 있어요. 그거 말고는 강아지 키우는 일이 재미있죠. 지금은 유기견 두 마리를 포함해서 네 마리를 키우고 있어요. 애들 똥 치우고 밥 주고 이러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요.”
- 제주 생활이 외롭지 않나요. 서울에라도 다녀오면 다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돌아오면 정말 좋아요. 그냥 ‘어제까지 재밌게 보냈다’는 생각만 할 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죠.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오는 길이니까요. 지금은 음반작업이 진행되는 상태라 가끔 가는데 금방 몸이 반응해서 아파요. 당장 그 다음날부터 두통이 와서 약을 먹게 돼요.”
▲ “자연 따라 사니 삶이 느려졌죠
서울로 오라는 게 가장 힘든 말”
- 제주 생활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요.
“예전엔 잃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적어졌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도 많이 없어졌어요. 오히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소중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가족, 음악동료들과 제 육신이 멀어졌다는 것이 가장 불편한 점인데 이것도 후회스럽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 삶이 느려진 것 같습니다.
“제가 원래 느린 편이었는데 더 느려진 것 같아요. (웃음) 서울에서 자랐지만 자라면서 사회인이 되는데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쫓겨 지낸 부분이 있었던 거죠. 여긴 자연의 속도 그대로가 제 삶의 속도가 돼요. 계획 없이 산다기보다는 여유로워지는 걸 느낍니다. 그러다보니 초조함도 없어지고 삶에 있어 더욱 많은 부분들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 그렇다면 적절한 삶의 속도란 어느 정도일까요.
“그건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니 제가 뭐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단지 분명한 건 모두 다 시간관념에 있어 급해진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모두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가만히 있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듯해요. 가끔 공연연습을 하다 보면 1박2일 일정으로 뭍을 다녀가는데 집에 돌아오면 정신이 없어 뭘 하고 왔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어느새 서울에서의 속도와 제 삶의 속도가 달라진 거죠. 올라가면 정신이 없어요.”
- 대중음악도 유행하는 속도가 달라진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금방 유행하고, 금방 소비되고, 금방 버려지죠.
“예전부터 그런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아 실감을 잘 못했어요. 그냥 속도가 많이 빨라졌구나 느낄 때는 공연할 때죠. 제가 금방 발표한 노래들이 갈수록 객석의 호응이 빨리 나올 때요. 인터넷으로 공연 후기를 관객분들이 쓴 걸 읽어보라고 후배들이 보내주는데 그때는 실감해요. 인터넷은 조금씩 하지만 전 컴맹이거든요. 예전에는 노래를 만들고 알리는 과정이 모두 아날로그적이었는데 이제는 디지털화됐다는 걸 그런 순간 느껴요.”
- 제주 생활을 통해 음악적으로 변한 것도 있을 텐데요.
“한꺼번에 많이 변하거나 한 건 아닌데 떨어져 있으니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 같아요. 서울에 있을 땐 그 안에 담겨 있어 모르는 부분을 제주에 있으니 바라볼 수 있는 거죠. 항상 음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선한 쪽의 이야기예요. 어떻게 표현하느냐, 방식의 차이겠지만요.”
-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아예 눌러 사실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제주에서 지내실 건가요.
“연말에 음반이 나오겠지만 거처는 안 변할 것 같아요. 나름대로 힘든 부분도 있고 낭만적인 것도 아니지만 가끔 찾아오는 선후배 동료들이 모두 절 부러워해요. 저는 왜 그러는지 알고요. ‘언제까지 살아야겠다’ 하는 계획은 없지만, 지금의 삶이 충분히 좋아요. 이제 다시 올라가서 살라는 말이 제게는 더 힘든 말이 아닌가 싶네요.”
6,]“아이를 키우려면 제대로 된 마을이 필요하다” 시골로 간 이웃들
모자라고 불편하게 살기]귀촌 교육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 - 카페 ‘이웃 린’
사람을 만나면 너른 마루가 돼 줍니다.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할 때는 트인 창문이 됩니다. 남고 모자람이 있다면 서로 메워주는 곳간이 되지요. 가을 햇살이 넉넉히 내리쬐는 카페 창가에 아줌마들 대여섯이 마주 앉아 수다를 떱니다. 가만히 엿듣자니 나눔과 배려, 공동체를 만들자는 얘기를 하는군요. 여기는 도시 카페가 아니랍니다. 바로 옆에 논밭이 있고 산이 울창합니다. 참 예쁜 사람들입니다.
▲ 건축가 국태봉씨 유학 중 영감
아이들의 영혼 살리기, 부모들과 공동체 의기투합
도심 떠난 가족들 행복 찾기 터전으로
이웃 린 공동체 회원들이 지난달 26일 오후 전북 완주군 고산면 ‘이웃 린’ 카페 앞마당에 놓여 있는 래프팅용 고무보트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노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카페운영자인 국태봉씨다. | 정지윤 기자
■ 시골 카페서 공동체를 꿈꾸다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서봉리 고산고등학교 바로 옆에는 ‘이웃 린(隣)’이란 카페가 있다. 전주에서 고산면 소재지를 가는 도로에서 좌측을 보면 먼 하늘 밑에 카페 하나가 보인다. 카페 주인은 국태봉씨다. 돈 벌자고 카페를 차렸다면 이 외진 곳에 터를 닦았을 리 없다. 이 카페는 고산면 일대 주민들과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심장부다. 그 주인 국씨는 33세의 총각이다. 결혼하고 알콩달콩 살아가기 바쁠 청년이 시골 외진 곳에 카페를 차렸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남을 위해 살아봅시다’라고 외치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졸업 후 번듯한 건설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근무는 딱 1년 만 했다. 처음부터 취직 목적이 여행경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어요. 1년간 번 돈으로 남아공과 유럽 등 미국만 빼고 세계 일주를 1년 반 동안 했어요. 배낭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지요.”
한국에 돌아온 그는 다시 취업했다. 이번에는 유학경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1년 반 동안 열심히 일해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2년간 건축디자인을 공부했다.
“유학 중에 큰 영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갱과 마약이 판치는 빈민가의 한 고등학교가 지역주민들의 도자기 체험이나 미술치료 등의 노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로 변신했다는 책을 읽으면서였지요.”
그는 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2009년 귀국했다. 그의 뇌리에는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자”는 목표가 설정돼 있었다. 귀향처는 고향인 고산을 택했다. 공간과 경비가 필요했다. 볕 좋은 곳, 그리고 전주시내에서 밀려나와 주눅든 아이들이 다니는 고산고등학교 옆에 터를 닦았다. 하우스 겸 카페를 짓는 공사는 두배나 걸렸다. 자신의 손으로 일일이 하다보니 착공한 지 1년도 넘어 지난해 문을 열었다.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던 청소년들이 카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국씨는 아이들을 껴안아주고 끌어들였다. 카페는 청소년들의 멘토링 사랑방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 십시일반 일군 ‘이웃 린’ 공동체
지난해 6월 고산면에 귀촌한 박현정씨(38)는 도로변을 달리다 생뚱맞은 광경을 봤다. 먼 하늘 아래에 걸린 ‘린 카페개업’이란 현수막을 본 것이다. 이 시골에 카페라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튿날 친구와의 약속을 그 카페로 잡았다. 박씨는 카페주인과 대화를 나누자마자 무릎을 쳤다.
“귀촌하기 위해 구마을회관에서 9개월 동안 살면서 새 집을 직접 지었어요. 저희 부부는 아이들을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서 키우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엔 4년간 시골학교로 통학을 시켰지요. 지금은 삼우초등학교에 6학년, 3학년 두명이 다녀요. 그렇게 아이들의 영혼을 살려주고 싶었는데 카페 사장이 훨씬 앞서 있는 생각을 하고 있지 뭐예요.”
박씨는 ‘이웃 린’ 교육공동체의 일원이 됐다.
아이들에게 어린시절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귀촌한 최영희씨(38)는 아이 셋이 모두 고산면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비슷한 사연을 통해 그 역시 어엿한 공동체의 주역이 됐다.
이남림씨(39)의 귀촌 이유도 아이들이었다. 남편도 아이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위해 시골로 들어가자고 했다. 무엇보다 한창 뛰놀아야 할 아이들에게 “아파트에서 뛰지 말라”고 질책하는 게 못마땅했다. 세명의 아이들을 모두 시골로 전학시킨 그가 ‘이웃 린’의 아름다운 생각에 힘을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에서 귀촌한 김지영씨(37)는 우연히 ‘이웃 린’ 교육공동체에서 정기적으로 펼치고 있는 주민 인문학강좌를 듣고 보따리를 쌌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어요. 시골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생전 느껴보지 못한 감동에 정신이 확 들더군요. 자신들보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쓰면서도 어쩌면 저리 행복해할까 하는 생각에 한 식구가 됐지요.”
장윤정씨(43)는 영재교육을 포기하고 귀촌해 교육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아이들은 도시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의 눈빛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장씨는 남편과 ‘다른 교육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자’며 결단했다. 주변에선 “공부 잘하고 있는 애를 망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하지만 시골학교로 온 아이들은 표정이 확 달라졌다. 서로 눈을 마주칠 줄 알고, 재미나게 놀 줄도 안다.
이런 저런 사연을 안고 귀농 귀촌한 젊은 세대 37명이 규합한 ‘이웃 린’ 교육공동체는 이렇게 시작됐다. 각자 갹출한 돈으로 운영기금도 조성해 협동조합 형태를 갖췄다.
■ 아이들의 행복이 마을의 행복
공동체가 맨 처음 벌인 사업은 멘토링 활동이었다. 주부들이 태반이다 보니 자체 공부가 필요했다. 강사를 초청해 애니어그램과 미술치료 교육도 받았다. 고산고 선생님들과 협의해 청소년들과 1 대 1 결연을 맺었다. 카페에서 만나 꿈과 진로이야기를 나누고 인문학 산행을 통해 시를 낭송했다. 사람 얼굴을 피하던 청소년들이 이젠 자신들의 끼를 봇물처럼 발산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색다른 문화체험 기회를 제공했다. 성남시에 있는 음악대안학교인 마마세이 학생들과 교류해 매월 1박2일 음악캠프를 열었다. 그쪽 학생들이 공동체에 내려와 시골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재능기부를 했다. 주민들도 동참했다. 지난 4월부터 5회에 걸쳐 드럼과 보컬, 기타 등을 학생들과 함께 배웠다.
지난 8월12일.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는 3일간의 음악캠프가 열렸다. 여름밤 노천광장에는 많은 주민들과 청소년들이 모였다. 보컬로 참여한 김지영씨는 “마음속으로만 하고 싶었던 보컬을 직접 관객들 앞에서 해내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이들과 주민들은 서로 손을 잡고 가슴으로 울었다”고 말했다.
엄마들의 인문학 학습동아리도 화젯거리다. 아이들의 행복한 교육은 공부하는 엄마들과 함께 이뤄진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부모교육과 역사, 성평등, 대안교육에 이어 문화마실과 도자기 교실을 마쳤다.
문제는 돈이었다. 조성된 기금은 다양한 사업을 벌이면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수익사업을 벌여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결실을 맺은 것이 발효빵 공장이다.
빵 공장이래봤자 컨테이너 박스에 설비를 들여놓은 게 고작이다. 화려한 빵이 아니라 건강한 빵, 주식으로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드디어 천연발효빵을 개발했다. 이스트와 유화제, 팽창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과일껍질과 우리 통밀가루를 사용해 일주일간 발효액을 만들어 자체 발효시킨다.이 빵은 “먹을수록 풍미를 느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빵”으로 품평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웃 린’은 빵굼터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내달부터는 생협과 지역 시니어클럽, 로컬푸드 매장에서 시판에 나선다. 물론 수익금은 지역공동체를 위한 문화·교육사업체에 재투자된다.
‘이웃 린’의 꿈은 하나다.
한 명의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선 제대로 된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 시골 학생과 주민들도 배울 수 있는 기회와 기쁨을 누려야 한다는 것. 아이들의 행복이 마을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8,드러난 ‘과속’… 한국 66년의 속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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