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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야기/세상살이이야기

김삿갓

by SL. 2012. 9. 11.

조부 욕되게 한 죄인이란 자책, 하늘마저 볼 수 없어 삿갓 쓰고 방랑

 

삿갓 쓰고 죽장 짚고, 물처럼 구름처럼 떠돈 시혼(詩魂)

- 이홍섭 시인이 말하는 비운의 방랑시인 김삿갓
1. 고은 시인이 노래한 김삿갓

 



지난 2007년 12월 8일, 북한 외금강호텔 회의장에서는 고은 시인을 비롯한 남녘 시인들이 모인 가운데 `김삿갓 문학의 밤'이 열렸다. 6·15민족문학인협회가 주최하고 통일부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현대아산이 공동 후원한 이날 행사는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김삿갓은 금강산을 찾아 쓴 시 `답승금강산시'에서 “평생 금강산 위해 시를 아껴왔지만/금강산에 이르고 보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소”라고 노래한 바 있다. 김삿갓은 금강산을 깊이 사랑하여 금강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여럿 남겼다. 이를 기억하는 시인들이 이곳에서 기념행사를 연 것이다.

고은 시인은 이 자리에서 “김삿갓은 당시 시의 상투적인 의미를 깨버렸다는 점에서 위대하다”며 “내가 해봐서 알지만,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나그네의 길에 다 바치는 지극히 어려운 일을 김삿갓은 했다. 김삿갓은 그렇게 처절한 삶, 시 정신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로 시작되는 김삿갓의 시 `난고평생시(皐平生詩)'를 낭송했다.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오르내리는 고은 시인과 조선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은 그렇게 한 몸이 되었다. 김삿갓의 문학사적 영향과 위상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2. 우리 문학사의 고유명사이자 보통명사

김삿갓(1807~1863년)은 우리문학사에서 고유명사이자 보통명사이다. 안동이 본관인 김병연(炳淵)이라는 한 개인을 가리킬 때는 엄연히 고유명사이지만, 덧없이 떠도는 모든 시인, 더 나아가 발길 머무는 곳 없이 방황하는 일반인들을 지칭할 때는 그냥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김삿갓에 매료되어 그에 대한 전기적 소설 `소설 김삿갓'을 쓴 작가 정비석은 `작가의 말'에서 “한국 사람치고 `김삿갓'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러나 이름만 알았다 뿐이지, 그가 어떤 사람이었던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 사람들은 김삿갓을 흔희 `한평생 술이나 얻어먹으며 돌아다니다가 객사한 거지 시인'으로 알고 있기가 고작인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말한 뒤, “한마디로 말하면, 김삿갓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활 시인이었고, 문학적으로도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세계적인 선(禪)시인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김병연은 조선 후기인 1807년 (순조7년) 3월13일 김안근(金安根)과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열 살 전후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달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에 의해 거듭 바뀌게 된다.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게 된 것이다. 김병연은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했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모친은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 신분을 숨기고 강원도 영월로 거처를 옮겼다.

김병연의 운명이 할아버지에 의해 다시한번 바뀌게 된 것은 스무 살 되던 해 향시에 참가하면서이다. 이날 향시의 시제는 “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 즉, “정가산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보라”라는 것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한 번 죽어서는 그의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라는 글을 써내려가 장원에 급제했다. 자신의 친할아버지를 통렬하게 욕한 셈이 된 것이다.

급제 이후 어머니에게서 집안의 내력을 듣게 된 김병연은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라는 신분에 대한 자탄으로 처자식을 둔 채 방랑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전국을 떠돌게 된다. 김병연이 김삿갓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스무 살에 오른 방랑길은 그칠 줄 몰라 죽을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방랑이 곧 그의 운명이 된 것이다.


3. 기존 관념에 도전장을 던진 치열한 시정신

그는 다른 뛰어난 문인들이 그러하듯, 천형과 같은 자신의 비운을 시로 표현해내면서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조선 후기의 봉건적인 체제 속에서 모진 운명과 싸운 몸부림이 시로 승화된 것이다. 그는 견고한 한시의 형식을 파괴했으며, 그 파괴를 통해 당대의 현실을 폭로하고 조롱했으며, 통속적인 관념들을 뒤집었다.

그의 시정신은 전통 시양식에 대해 도전장을 던졌던 1980년대 해체시의 정신과 닿아 있다. 그의 시는 기존 한시들이 다루지 않던 비시적 (非詩的)소재들을 끌어들여 기존 관념을 해체하면서 이전 시대에는 부족했던 구체성과 정직성을 획득했다. 그는 이나 벼룩 등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소재들을 과감하게 끌어들였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성(性)에 관한 표현을 거침없이 썼다. 그의 시가 한시가 해체되면서 개화기 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전형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런 풍자, 비판류의 시만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도 이를 초월하고자 하는 내면 응시의 작품도 여럿 남겼다. 고은 시인이 낭송한 `난고평생시'가 이러한 유형에 해당한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한시미학산책'에서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 시를 읽을 때마다 필자가 느끼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경국제세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썼더란 말인가? 그인들 이런 시를 짓고 싶었겠는가. 그에게 이런 장난질에 몰두하게끔 강요한 현실이 역으로 희대의 민중시인을 낳았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라고 말한 뒤 “그의 시에 이나 벼룩, 욕설과 섹스 등 비시적 대상의 시화가 지배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조부의 훼절에 말미암은 개인적 연우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김삿갓의 시정신은 당대 조선 사회가 처했던 제반 역사 환경의 변모에 의해 안받침되어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는다.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정 교수는 “그의 웃음은 슬프다. 그 슬픈 웃음의 뒤안길은 외면한 채 자꾸 가십적인 살을 붙여 그를 봉이 김선달류의 `비천한 재담가'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악취미다.”라고 덧붙였다.


4. 또 다른 김삿갓, 이응수와 박영국

김삿갓을 만나는 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람이 두 분 있다. 한 분은 김삿갓의 시를 처음 본격적으로 수집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알린 이응수씨이고, 다른 한 분은 김삿갓의 묘를 찾은 향토사학자 박영국씨이다.

이응수 씨는 전국의 수천 서당을 찾아 훈장들이 전해 주는 김삿갓의 시를 수집했으며, 광고를 통해 김삿갓의 시를 모으기도 했다. 그는 이 시들을 가려내 1939년 학예사에서 `김립 시집'을 출간했다. 이 시집이 출간되자 여러 곳에서 그에게 김삿갓의 시를 보내왔으며 그는 다시 고증을 거처 1941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증보판 `김립 시집'을 간행했다. 학예사 판에는 183편이었던 시들이 증보판에서는 343편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김삿갓 시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김삿갓의 시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김삿갓처럼 전국 팔도를 떠돌며 그의 시를 모은 이응수씨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 평양국립출판사에서 `풍자시인 김삿갓'을 펴냈는데, 발행 부수가 무려 2만부를 넘었다고 한다.

기억해야 할 또 다른 한 사람은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 씨이다. 평생을 김삿갓 연구에 바친 박씨는 1982년 “김삿갓의 무덤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양백지간, 영월과 영춘 어간에 있다”라는 고문서 기록 하나에 의지해 마침내 영월 와석골 노루목에서 무덤을 찾아냈다. 비운의 시인 김삿갓에 대한 이 두 분의 끝없는 연모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김삿갓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 두 분의 노력과 늘 떠도는 이 땅의 수많은 시혼(詩魂)들에 의해 김삿갓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무작정 떠나고 싶은 취한 사내들의 꿈이었을지 모른다

 

소설가 김도연씨와 찾아간 김병연이 잠든 영월 김삿갓면


김삿갓의 집안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홍경래의 난이 휘몰고 온 여파로

멸족과 폐족의 길을 걸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월에서 숨어 살다가

22살이 되던 해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김삿갓은 길을 떠난다


그가 전국을 떠돌고 있을 때

아들은 세 번 아버지를 찾아왔으나

모두 따돌리고 도피의 길을 선택했다

그가 전라도 화순서 운명을 달리하고서야

아들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실 수 있었고

유해는 영월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혔다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위치한 김삿갓 묘역.

◇조선조 말엽 전국을 떠돌며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사회를 비판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거주한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위치한 김삿갓 주거지와 김삿갓 주거지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성황당

 

김삿갓 북한방랑기'라고 아시는지? 아니면 `김삿갓 방랑기'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당연히 텔레비전도 없던 어린 시절 고무줄로 건전지를 둘둘 감은 라디오는 대단히 매력적인 기계였다. 그 라디오 프로그램 중 내가 애청하던 방송은 당연히 `김삿갓 방랑기'였다. 김삿갓은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권력과 부를 남용하는 이들에겐 따가운 일침을 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 한 수를 읊는 것으로 5분극을 마무리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그렇게 내 마음 속으로 처음 들어와 자리를 틀고 앉았던 것인데 불행하게도 내겐 멋진 삿갓과 구부러진 죽장(竹杖)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지게작대기를 들고 밀짚모자를 쓴 채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래봤자 겨우 마을 한 바퀴 돌고 지쳐 집으로 돌아왔지만.


난고 김병연이 잠들어 있는 영월군 김삿갓면으로 가는 길에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김삿갓면 예밀리 만경대산 중턱에서 십오 년째 살고 있는 시인 유승도가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형에게 동행을 청했고 우리는 함께 김삿갓 계곡으로 들어갔다. 원주에서 달려온 착한 아기아빠인 오윤석 기자는 이미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김삿갓 문학관 주차장에서 만난 우리 세 사람은 먼저 허기진 배부터 달래야만 했다. 주차장 옆 식당의 정자에 앉아 먼저 감자부침개에 영월막걸리 한 병을 비우니 이윽고 큼직한 삼계탕이 나왔다. 닭의 두 다리는 유승도 시인이 먹었고 나는 가슴살을 씹었다. 솥 옆에 앉은 오윤석 기자는 어느 부위를 먹었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역사 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의 지금까지 일정상 가장 푸짐한 밥상이라 마치 김삿갓이 어느 환갑잔치에서 시 한 수 지어주고 먹는 밥인 것만 같아 몸과 마음이 골고루 포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는 먼저 2003년 개관한 문학관부터 둘러보았다. 삿갓을 형상화한 문학관은 이층 건물이다. 김삿갓 연구에 평생을 바친 박영국 선생이 수집한 자료들이 기획전시실에 전시되고 있었다. 영상실에서는 김삿갓의 생애를 한눈에 살펴볼 수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 각지를 답사하여 김삿갓의 시를 수집한 이응수 선생이 1939년에 엮은 `김립시집'을 필두로 다양한 출판사에서 발간한 김삿갓 시집과 관련 서적들을 전시한 난고문학실. 친필이 있는 자료실 등등이 문학관의 각 방을 단풍처럼 물들였다. 그 방들을 차례로 둘러보다가 내 발길이 오래 멈춘 곳은 다름 아닌 노래와 영상이 흘러나오는 브라운관 앞이었다. 1955년 명국환이 부른 바로 그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이 나오는 화면 앞에서. 그 노래는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네 아버지들이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부르던 노래가 아니었던가.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 리 /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어쩌면 김삿갓은 세상살이 훌훌 떨쳐버리고 삿갓 쓰고 죽장 든 채 무작정 떠나고 싶은 취한 사내들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취한 사내들의 작은 꿈일 뿐이다. 그러니 아내들이여, 어린 자식들이여, 부디 노여워 마시고 혜량 있으시길! 역대 김삿갓 문학상 수상 시인들의 시비를 둘러보고 나오는데 길 옆 상가에서 삿갓을 진열해 놓은 게 보였다. 주인에게 물으니 많으면 하루 이십여 개의 삿갓이 팔린다고 했다. 담양에서 만든 삿갓은 10만원이고 중국산은 1만5,000원이란다. 아내들이여, 중국산으로 하나 선물하시길.


김삿갓의 집안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홍경래의 난이 휘몰고 온 여파로 집안이 멸족과 폐족의 길을 걸었다. 멸족은 한 가족을 멸하여 없앰이고 폐족은 형을 받고 죽어서 그 가족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의 족속이라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어머니를 따라 영월에서 숨어 살다가 22살이 되던 해에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김삿갓은 길을 떠난다. 그가 전국을 떠돌고 있을 때 김삿갓의 아들은 세 번 아버지를 찾아왔으나 모두 따돌리고 도피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 그가 전라도 화순에서 운명을 달리하고 나서야 아들 익균은 비로소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올 수가 있었다. 유해로. 아들 익균은 아버지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곳으로 걸었다. 볕이 좋은 자리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백산과 소백산의 정기가 만나는 명당이라고 한다. 문학관을 나와 노루목다리를 건너면 바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벼슬을 하지 못한 그의 묘역은 소박했다. 1989년 7년간의 법정싸움 끝에 승소해서 마침내 묘비가 세워졌다. 시선난고김병연지묘(詩仙皐炳淵之墓). 동행한 유승도 시인은 신선 선(仙)이 좀 과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시인이 아닌 고로 나는 대답하기 힘들었다. 다만 멀리 전라도 화순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괴나리봇짐에 담아 등에 지고 영월까지 걸어왔을 아들 익균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궁금했다.


묘역 옆에는 작은 움막이 있는데 그곳에는 수염 성성한 사내가 흰 두루마기를 걸친 채 앉아 있었다. 현대판 김삿갓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더 이상의 신상에 대한 물음은 호탕한 웃음으로 대신할 뿐이었다. 움막 안의 시계는 거꾸로 걸려 있었다. 그의 일상이 궁금해 이것저것을 물었으나 속세를 떠나 신선 세계에서 사는 듯 답변이 초연하여 구름처럼 떠다녔다. 진흙탕 깊이 발목이 잡혀 있는 나로서는 허겁지겁 움막을 벗어나야만 했다. 김삿갓이 저러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몰래 하며 삿갓도 죽장도 없이 마대산 계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삿갓 주거지로 추정되는 마대산 계곡 길은 아름다웠다. 안내 팸플릿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묘역 앞에서 주거지까지의 거리는 1.8㎞다. 충청도와 강원도를 9번 넘나들어야만 갈 수 있는 이곳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축지법을 쓸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계곡물을 경계로 강원도와 충청북도, 영월 김삿갓면과 단양 영춘면이 갈라진다. 그 계곡을 올라가는 길이 문제인데 수시로 양쪽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이채로웠다. 김삿갓 주거지는 그 계곡 안쪽 햇살 좋은 자리에서 200년 된 고욤나무, 돌배나무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집 왼편에 난고당(皐堂)이란 사당이 있는데 영정 아래에 크고 둥근 돌 하나가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갖추고 시선 김삿갓 선생의 지혜를 받아가라는 글이 문에 붙어 있지만 나는 그 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문밖에서 계속 서성거리는데 유승도 시인이 바로 옆 산 너머로 가서 막걸리 한 잔을 하자고 나를 끌었다. 산속에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주막이 있다는 얘기였다. 짧아져가는 해가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천리길 나그네 가진 것 겨우 지팡이뿐이니 / 남은 돈 일곱 닢 오히려 많다 하겠네 / 주머니 속에 깊이깊이 간직하자 다짐했건만 / 석양에 주막을 만나니 아니 마시고 어쩌리.


마대산 계곡 마지막에 있는 `우구네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풋고추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마당에선 붉은 고추가 마르고 있었고 이십 년 전 이곳으로 들어온 주인 내외는 눈빛이 선량했다. 가난한 시인은 자고 가라며 우리를 계속해서 붙잡았다. 하지만 오윤석 기자는 예쁜 아기를 보러 가야 했고 나는 돌아가 생계형 원고를 써야만 했다. 나는 눈에 물기가 많은 시인이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 우구 엄마에게 억지로 건네는 장면을 오래 바라보며 김삿갓의 난고평생시(皐平生詩)의 마지막을 가만히 웅얼거렸다.


이제 돌아가기도 어렵고 / 머물기도 난처하니 / 금후 또 몇 날이나 / 이렇듯 길가에서 헤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