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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야기/생각해보면

왜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하는가

by SL. 2017. 10. 12.

2014.10.10 


2016년은 한국에서 복지제도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된 시점으로 기억될 만하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스위스에서 실시된 기본소득 찬반투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일자리가 AI(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었을 때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 우려하는 상황에서 재산의 보유 여부, 근로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개인에게 생계를 보장하는 수준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고민해볼 가치가 있는 대안이었다. 


대선과 맞물려 일부 정치인들의 기본소득에 대한 공약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은 그 대가를 고려하지 않은 막연한 기대이거나, 먼 훗날에 논의될 만한 이야, 또는 허황된 주장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시민이라면 기본소득이 주장되는 배경과 지향성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기계와 소프트웨어에 의한 노동의 대체는 이미 진행되어온 현실이지 결코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경우 1990년 대비 2015년 1인당 GDP는 실질가치로 2.6배에 달하지만 실업률은 2.5%에서 3.6%로 훨씬 더 높아졌다. 무엇이 증가된 생산을 담당했겠는가? 


많은 학자들은 생산의 증대가 가져오는 일자리의 창출보다 기계에 의한 일자리의 대체가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미국의 고숙련 노동자에 대한 총수요는 2000년을 기점으로 점점 감소하는 추세라는 연구가 있다. 유럽 국가들에서 두 자리 실업률이 일상이 된 지 오래이다.


특정 직업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내 일의 일부가 기계에 의해 대체되고, 언제부턴가 신입사원을 덜 뽑으며, 동료들이 조기 퇴직을 한다. 차라리 오늘 나의 직종이 사라져 버린다면 다 같이 저항이라도 해볼 테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기를 바라지만 정작 사회적 차원의 대안 모색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은 현재의 경제성장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업은 극단적인 양극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숙련 노동 수요의 감소는 많은 사람들을 저임금·비숙련 노동으로 내몰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소득이 소수의 인구에 집중되고 있다. 한국에서 개인소득 상위 10%가 차지하는 전체 소득에서의 비율은 1995년 29.2%에서 2012년 44.9%로 증가하였다. 


소수의 부자들이 창출할 수 있는 수요는 공급능력에 미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만성적인 수요부족이 성장을 가로막는다. 기계에 의한 대체만 발생하고 경제가 성장하지 못할 때 그 결과는 자명하며,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생산력이 발전함에도 대다수 사람들이 궁핍해지는 현실의 모순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중심 성장 정책은 성장 후 분배 시스템에서 벗어나 분배를 통한 성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지시스템의 패러다임 변화도 필수적이다.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충분히 정당화


현재의 복지시스템은 완전 고용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경제의 자율조절 시스템은 대다수 사람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며, 실업은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불균형에 의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지속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게으르거나 무능력을 내재화한 소수의 실패자들이라는 편견이 만연하다. 


하지만 현대 경제는 구조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일부에서는 구조적 실업이 시장의 자율조절 능력을 가로막는 규제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 실험은 실패로 판명되었다. 


길거리의 노숙자들은 보통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먼저 희생양이 된 사람들일 뿐이다. 일부에서는 미래에 47%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생산력의 급격한 증대에도 우리가 일자리와 생계를 고민해야 한다면 이는 현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기본소득은 생산요소의 제공과 무관하게 지급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의 기본 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정의관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기본 권리와 자유에 대한 철학적 논의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순수 경제학적 관점에서도 기본소득은 충분히 정당화 될 수 있다.


우선 대표적인 기존 복지시스템인 생계급여에 대해 알아보자. 생계급여는 4인 가구 기준으로 가구의 소득 인정액이 중위소득인 5,000만원의 29%(1,500만원 수준)에 미달할 경우 미달 금액을 정부가 보전해 주는 제도이다. 


즉 4인 가구에서 500만원/년의 소득만이 발생하면 정부가 1,000만원의 소득을 보전해 주는 것이다. 이 제도 하에서 근로자가 500만원/년의 소득을 벌다가 더 노력해서 추가로 1,100만원을 벌어들였을 경우 정부의 급여 1,000만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 실제 증가하는 소득은 100만원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이로 인해 생계급여 대상에서 제외될 경우 다시 생계급여 대상자로 인정받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결국 이 사람은 더 일하고자 노력하기 보다는 생계급여 대상자로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을 경제학자들은 빈곤의 함정이라 부른다. 


또한 생계급여자들은 스스로의 불쌍함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며, 부당 수급자를 찾아내기 위한 감시의 대상이 된다. 부정수급자를 찾아내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세금이나 축내는 사회부적격자, 게으름뱅이, 잠재적 사기꾼이 된다. 이런 낙인효과가 그들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짓게 하고 자활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이런 노동유인의 왜곡이 기본소득 상황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노동 여부와 무관하게 제공되므로 개인들이 노동을 통해 벌어들이는 소득은 완전히 실제 소득의 증가로 이어지게 된다. 


기본소득을 제공하기 위해 세율이 증가한다 해도 사람들이 최소생계비에 해당하는 기본소득에 만족하여 노동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자들은 대체로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기 보다는 노동시간을 단축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는데 이는 부족한 일자리의 나눔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핀란드에서 진행되는 기본소득 실험은 근로의욕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제도가 가지고 있는 행정적 비효율을 제거한다. 무조건 지급되는 기본소득 하에서는 생계급여에서와 같은 근로능력의 판정, 소득조사, 재산조사, 부양의무자 판정, 부당 수급자의 적발과 같은 행정행위가 필요치 않다. 이런 행정적 비효율의 문제는 현재의 복잡한 복지시스템과도 관계된다.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보장 사업 목록에는 286개 사업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안내책자만 400~500페이지가 된다. 필요한 사람이 해당 사업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힘들며, 이런 복지시스템을 이해하고 운영하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기본소득은 하나의 단순한 제도를 통해 기존 수많은 복지사업들을 상당 부분 대체함으로써 행정적 낭비를 막고 기존 복지자원의 효과적 사용을 가능케 한다. 기본소득을 통해 기본적인 생존권이 확보된다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다.


기본소득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재원마련의 현실성일 것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2016년 기준 3,195만원이다. 4인 가구에 현재의 생계급여 수준(1,500만원/년)을 보장하기 위한 1인당 평균 기본소득액은 375만원/연(1,500/4)으로 1인당 GDP 대비 11.7%에 불과하다. 


우리의 평균적 소득 수준은 기본소득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 한국의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율은 2014년 기준 10.4%(정부 예산 중 30% 수준)이며, 이는 OECD 평균 21.6%에(조사대상 28개국) 대비 절반 수준이다. 한국이 OECD 평균 사회복지지출 수준에 도달한다면 의료, 교육, 주택 등 특정 목적형 복지 제공을 유지하면서도 4인 가구에 1,500만원/연 이상의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다.


두려움 버리고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


기본소득이 쉽게 도입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와 조세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해야만 한다.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되 지향성을 가져야만 한다. 


일부에서는 프리드만이 제안한 음소득세를 옹호한다. 음소득세는 최저생계를 보장하되, 소득 수준에 따라 정부의 보조금을 달리하는 제도로 기존 조세 제도의 변화를 최소화 하면서 복지체계의 변화를 추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도기 체제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지원이 필요치 않은 사람들에게도 재정지원을 한다는 기본소득의 개념에 아직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일자리 감소가 대다수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면 지금의 선별적 복지 개념이 유지 가능한 것인가? 현재 상황만을 고려해도 기본소득은 중산층에게도 실질적인 혜택을 줄 수 있으며, 전반적인 근로시간의 단축과 그에 따른 일자리 나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고민하고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일부에서는 일자리가 없어진 상황에서 소득만이 보장되는 삶을 대안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득은 생존 뿐 아니라 보람 있는 삶의 필수 요건이다. 


생산력이 이토록 향상된 사회에서 젊어서는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고 나이 들어서는 진 빠진 허탈함을 견뎌야 하는 현재를 고수해야만 하는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고 재미와 자아실현을 위해 학습하고 노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생계의 걱정에서 벗어난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기본소득은 일자리 부족의 사회에서 모든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할 것이며, 이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탈피하여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창조적인 사고를 할 것이며, 공동체에 기여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공유한 획일적인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본소득 하에서 생계를 위한 강요된 자유가 아닌 진정한 자발성에 근거한 민주주의와 시장주의가 꽃필 수 있을 것이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는 “새로운 이념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래된 이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두려움을 버리고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http://v.media.daum.net/v/20170927094138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