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iF you don't act, nothing changes.
^^공간이야기/여 행

실학의 여행

by SL. 2012. 10. 12.

1. 다산 실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ㆍ냉철한 자기성찰 '다산학' 밑거름

 

올해는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네스코(UNESCO)는 다산의 위대한 업적을 기려 ‘2012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장 자크 루소, 헤르만 헷세, 드뷔시와 함께 4인 공동으로 선정됐다. 다산관련 기념행사도 줄을 잇고 있다. 필자는 다산탄신 250주년 및 유네스코 세계문화인물 선정기념 행사와 학술대회와 ‘실학기행 2012’에 직접 참여해 다산 형제의 유배지인 강진·흑산도를 다녀왔다. 다산연구와 현장답사를 통해 ‘왜 다시 다산인가’ 라는 취지에서 다산 탐사 내용을 5회에 걸쳐 소개한다.

1. ‘다산 실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 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경기도 남양주시 한강변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대학자로 명성을 남기고 1836년 향리에서 7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올해는 다산 선생이 태어난 지 250년이자, 세상을 떠난 지 176년이 된다. 활동하던 때로 보자면, 다산은 200년 전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가 생전에 이룩해 놓은 광대한 학문인 ‘다산학’이 오늘 우리에게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실학기행 2012’ 참가자들이 사촌서당 앞에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으로부터 다산 관련 설명을 듣고 있다.

 

 

21세기에 왜 다시 정약용인가

‘실학기행 2012’에 동참한 80여명 일행의 첫 걸음은 마재마을의 낮은 뒷동산 다산묘소 참배로부터 시작됐다. 숙연하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묘소도 이렇게 기품있을 수가 있구나 싶었다.
일행은 실학박물관에서 1시간여 다산강론을 듣고, 이어 다산의 공부방 여유당(與猶堂)을 둘러보았다. ‘여유’란 ‘겨울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으로 ‘노자’에서 구절을 따 온 것이라 했다.

다산에게 있어, 세상사에 대한 경계는 관직에 오른 후에도 그가 평생 지켜야할 잠언 같은 것이었다. 1800년(정조24) 1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 마재로 돌아와 조용히 여유당에서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다산을 끌어내 머나먼 유배길에 오르게 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시공을 넘어 21세기인 지금도 애틋한 스토리로 다가온다.

인간 정약용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다산의 ‘인간학’과 ‘인간’ 다산의 총체는 사람의 존재를 무엇보다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자신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을 매우 중시하였다.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관계의 연속이고, 그것이 인간존재의 본성이라 하였다.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다산은 사회적관계로 파악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유배생활을 통해 민(民)을 폭넓게 이해하고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 1801년 유배초기 강진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거주할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 때 주막의 한 이름없는 노파가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주어 학문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데서 민을 새롭게 인식했던 것이다.

민들과의 관계와 덕성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공감하지 않으면 체험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그것은 유배를 통해 다산만이 가질 수 있는 망외의 소득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배라는 공간은 다산의 사회적 존재방식과 인간관계를 바꾸게 했고, 종국에는 다산본인의 인식과 정서자체를 변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위민’서 비롯된 다산학은 곧 인간학
다산에게 경학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시문이었다. 이유는 그 속에 민의 삶과 정감이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이며 민에 대한 기본적 신뢰에 기초하고 민 특유의 낙관적 삶과 그 내면적 정감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다산은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반이고, 남은 반은 목민(牧民)이다”라고 하여 사대부의 존재방식을 규정하면서, 벼슬에 나서기 전에는 수신을 하고 벼슬길에서는 진정한 목민관을 추구했다. 솔직하고 곧은 성품의 소유자인 다산은 정조의 총애에 뛰어난 학문적 자질, 그리고 관료로서의 실무능력을 무기로 행동에 거칠 것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직선적인 성격에다 구애받지 않은 솔직한 언행은 복잡다단한 조선시대 파쟁적 정치세파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다산은 자신의 당호(堂號)인 여유당을 회고하며 언젠가 다음과 같이 숨은 속내를 말한 적 있다.

“나의 병통은 용감하지만 지모가 없고 선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 모르며,
맘 내키는 대로 행하여 의심하거나 두려워 할 줄 모르는데 있다“

솔직하게도, 대 학자는 ‘그만둘 수 있는 일도 마음에 기쁘면 하고, 하고 싶지 않지만 마음에 불쾌하면 그만두지 않았다’는 말로 순리를 따르지 않았음을 가감없이 술회하고 있다. 이어서 유배에 대해서도 ‘나 자신의 운명이라기보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행동과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자기고백을 한 바가 있다. 이런 것들이 인간 정약용의 참된 모습이며, 학자일 뿐 만 아니라 시문학인으로 인간사회와 세상을 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겸하여 가졌기에 그런 냉철한 자기성찰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인간 다산의 내면은 끊임없는 자기절제와 성찰로 귀결된다. 그 위에 다산 사상과 학문이 자리했기에 오늘날의 위대한 ‘다산학’이 태동한 게 아닐까.
주지하다시피,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은 실학(實學)을 집대성, 조선의 새 길을 제시한 대학자이자 위대한 사상가였다. 반계(磻溪) 유형원, 성호(星湖) 이익으로 이어져온 ‘경세치용파’의 사유와 개혁정신을 계승하면서, 일찍이 규장각 홍문관에서 ‘이용후생파’의 세계와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접하고 그 과학기술을 체득, 실현하였다.

다산은 실학을 통해, 인간 존재와 현실적 문제의식에 비추어 유교경전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사유의 바탕과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품성을 닦고, 소위 정법집(政法集)으로 불리는 1표(表)2서(書)와 논설들을 통해 치인(治人)의 정도와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는 인간학과 경학(經學)을 토대로 사회개혁, 과학기술, 서학 등을 자아화(自我化)하였다. 인문적 주체인 자아를 갈고 닦으면서 사회과학과 과학기술을 회통한 점이 주목된다.

   
 

다산학 핵심은 경학 그리고 시문학
다산학의 핵심은 뭐니해도 그가 남긴 경학 저술에 있다 할 것이다. 한편으로, 다산학에서 문학의 비중도 경학 못지않게 다루었으며, 시문 작품 속에 현실과 이상을 늘 함께 그리고 폭넓게 사유하였다. 그렇듯 다산의 시문은 그의 경학세계에서 자주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의 경학과 문화의 만남에 대하여 검토해 보기로 한다. 다산은 자의시(字義詩)에서 인(仁)을 중심으로 한 경학적 성과를 칠언절구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 다스리는 게 바로 두 사람이니 ... 人以治人是二人
두 사람이 관계 맺을 때 곧 인이 되도다 ... 二人之際卽爲仁

인이란 사람과 사람의 ‘지극한 관계’라 하였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목민관가 백성간 二人이 그런 관계라는 것이다. 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다산의 경학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민의 현실과 삶을 주제로 포착한 시문이 많은 것도 근원을 파고들면 다산의 경학세계와 합치되고, 상호연관 하에 있기에 그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포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실학은 조선후기의 대표적 사상’이라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조선후기는 현실과 제도의 간극이 너무 먼 시대였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조선후기의 과학적 실용사상이 실학인 것이다.

우리역사상 조선시대의 선각자적 개념인 ‘실학사상’은 자연히 낡은 제도와 관념적 사유를 벗어버리려는 문예부흥적이며 문명의식적 성격을 담고 있다. 다산학 속에 경학의 집대성 뿐 아니라, 인간학·시문학, 그리고 다산철학까지 함께 베어있다고 보는 이유도 그런데 있다. 게다가 ‘다산학의 세계화’가 자리하고 있으며,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다산탄신250주년을 기념해 ‘실학기행’에 나서 다시 다산을 찾게 된 연유 또한 거기에 있다 할 것이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귀양길에 머문 나주 밤남정, 주막집 흔적없고 이별가에 남아

 

 
다산 형제가 유배길(1801년 11월)에 손을 맞잡은 후 헤어졌던 나주 ‘밤남정 삼거리’. 마을 주민들은 왼쪽 건물의 중심부에 있는 스레트집이 오래된 주막집이었는데, 이집에서 정약전·약용 두 형제가 하룻밤을 체류한뒤 형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각기 다른 유배길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그 역사를 말해줄 아무런 흔적도 없다.
 

1. ‘다산문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다산 유배의 배경과 신유박해
다산 정약용 유배의 배경에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자리하고 있다. ‘신유박해’는 1801년(순조1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을 말하며,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도 불린다. 신유년 박해사건은 ‘황사영 백서’에 기인, 천주교 신도 3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끔찍한 사건이었다.

때는 정조 24년(1800) 6월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곧 이어 7월4일 수빈 박씨의 소생인 순조가 열한살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당시 노론벽파의 실세였던 김귀주 누이로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는 어린 왕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며 전면에 나서게 된다. 정순왕후와 노론벽파는 정적인 노론시파와 남인 중심의 신서파(信西派·천주교를 믿었던 사람들)를 제거하며 실권을 잡는 기회로 삼는다.

남인의 신서파는 젊고 개혁적인 인물들로 서양 학문과 천주학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정약용은 남인으로 천주교 중심인물들의 상당수가 모두 집안사람들로 얽혀있었다. 신유박해로 다산의 정씨 일가는 풍비박산이 난다. 매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은 참수 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되었으며, 선교사 주문모를 비롯해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 최필동 등 서교의 혁신인사 수뇌부가 즉각 참수형을 당한다. 이어 400여명이 유배 길에 오르게 되는데, 다산의 둘째 형 정약전과 정양용 형제도 그 중에 끼인 신세가 된다.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순조 원년인 1801년 11월22일, 다산은 함께 옥살이를 하던 사랑하는 둘째형 정약전(丁若銓·1758~1816)과 함께 유배길에 올라 다시 만나리라는 기약도 없이 영영 이별하게 된다. 밤남정의 이별을 그린 ‘율정별(栗亭別)’은 두 형제 유배살이의 애달픈 심정을 가장 비통하고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시이자, 지금도 다산 독자에게 심금을 울리는 이별가로 다가온다.

주막초가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 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다산 형제를 지극히 아껴주던 정조의 승하는 이들 천재 형제가 중앙정계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신유사옥 때 다산은 서학(西學), 곧 천주교와 관련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정약용에 있어 서학은 동서문명의 만남과 융합이라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다산의 시 ‘율정별(栗亭離)’에 나오는 나주 밤남정 주막거리는 옛 한양가는 길목이었으며, 지금도 831번 지방도가 2차선으로 지나는 요충지다.
 
서학(西學)을 서양문물 차원서 심취
다산을 향한 모진고문에도 불구, 서학(西學)과 동서문명 비교 관심차원의 연구와 심취라는 측면, 그리고 전적인 천주교 신봉자가 아니라는 결정적 증가가 나오자 조정은 끝내 사형을 언도하지 못하고, 그를 머나먼 남쪽으로 유배 보내게 된다. 귀양길에 두 형제가 몸을 비비며 하룻밤을 새운 나주 밤남정 주막집은 두고 두고 한이 서린 집이 되고 말았다. 강진 귀양살이 7년째 이던 때에 형님의 편지를 받고 읊은 시에서도 밤남정이 다시 등장한다.

살아서는 미워할 밤남정 주막(生憎栗亭店)
문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열렸네(門前岐路叉)

넓디넓은 하늘 땅 바라보노라면(曠然覽天地)
슬픈 생각 언제나 가 없구나(惻恒常无涯)
- 둘째형님 편지를 받고(奉簡巽庵)

다산은 18년만에 해배(解配)되어, 드디어 고향인 남양주 마재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자 곧 둘째형의 일대기를 ‘선중씨정약전묘지명(先中氏丁若銓墓誌銘)’ 이라는 이름으로 집필한다. 거기에서도 나주성 밤남정에서 형제가 헤어지던 순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다산은 손암일대기에 18년전 유배길에서 형님과 헤어진 때와 장소를 분명히 적고있다. 그 이전, 흑산도 유배살이 중인 형님이 죽고(1816.6월) 3년이 지난후 해배되자 강진을 떠나 귀향길에 밤남정의 길목을 경유해 돌아왔노라고 했다. 형님의 시신도 나주의 밤남정을 경유해서 선산으로 돌아와 선산의 동쪽 언덕에 묻혔다고 써 놓았다.

   
‘실학기행2012’ 팀이 다산초당 인근 백련사를 방문, 간담모임을 갖고있다. 2km 거리에 있는 백련사에는 조선후기 다산과 깊은 인연을 맺은 혜장스님이 있었는데 두사람은 서로 좋은 우정을 나누며 많은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밤남정 주막골 그곳에 가보니…
밤남정은 그렇듯 두 형제에게 통한의 유배길 중, 마지막 갈림길이면서 생이별의 장소였다. 해배 후에도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200년 전 유배의 몸으로 한양 천리길을 끌려 온 선비 형제가 나주성 북쪽 입구 주막골에 도착, 마지막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율정별(栗亭別)’이라는 명시(名詩)를 남기고 떠난 그곳 밤남정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9월24일 오후, 필자는 나주시 대호동 밤남정 3거리 주막골 현장을 답사했다. 그곳까지는 동신대학교 정문에서 831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550m 거리였다. 방남정은 나주평원중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옛 들길에 자리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사는 최준희씨(79)는 “밤남정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래 마을이름은 밤나무정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한 때는 주막거리를 중심으로 번화를 누렸지만 현재 18세대가 살고있다고 한다.

전직 공무원 출신인 최씨는 “다산 정약용선생 형제가 유배 길에 끌려가면서 이곳 밤나무정 주막골에 하룻밤 묵고간 집을 알고 있다”며 필자를 안내했다. 최씨에 따르면 “그 주막집은 오래전 김무일이라는 사람이 주인이었을 때 여자를 여럿 두고 술을 파는 집이었으며, 일대 주막으로선 가장 규모가 컸고 손님도 줄을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노안삼도로 73’이라는 문패가 달린 집에 도착했다. 나주성 밤남정의 옛 주막집 주소는 현재 나주시 대호동 447-2번지로 되어있다. 사진에서 보듯 파란 스레트지붕에 도로가의 전통가옥이었다. 마침 집 주인이 나타나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주인 이석범씨(77)도 “유배 길을 떠난 다산 선생님이 이 집에 머물다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고 했다. 이씨는 “20년 전 이 집으로 이사와 처음 15년동안 수퍼점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폐업하고 주거생활만 하고 있다”고 한다.

200년 전, 다산형제가 묵었다는 주막집은 가운데 본채 옆 남단에 덧대지은 작은 집(노안삼도로 71)과 북단에 정미소(노안삼도로 75)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옛 주막집은 원래 이 세집을 합해 운영됐다고 한다. 말하자면 다산이 언급한 주막집은 술밥도 팔고 유숙도 하는 일종의 객관(客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 씨는 “지금의 자리에 있는 주막집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묵고 갔다는 전언일 뿐, 다산의 글에 나오는 율정 초가집이 ‘바로 이 집이다’ 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다. 옛 선비는 떠나갔고, 흔적이라곤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함에도, 다산의 애틋한 심경을 담은 글들과, 한서린 유배길 중에도 빼어난 문장으로 남긴 시문들을 읽다보면 절로 숙연해 진다. 한편으로, 200년 전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선연한 숨결이 아직도 어딘가엔 남아있는 것 같아, 대(大)선비의 흔적을 찾아 떠난 ‘실학기행2012’는 그래서 더욱 인걸(人傑)이 그립고 쓸쓸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혜안으로, 담대한 조선의 새 길을 열다

 

1. ‘다산문학’은 인간학과 경학의 만남이었다
2. 밤남정 주막집의 두 형제이별
3. 강진·흑산도에서 만난 실학의 혼
4. 유배지서도 꿈에 그리던 고향 ‘초천’
5. 유네스코선정 ‘2012세계문화기념인물’

다산학(茶山學)을 대표하는 중심 가치는‘인간’이다. 6경4서를 집대성 재창안한 실학(實學)의 주체는 단연 ‘인간 중심’이었다.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가 올해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을 기해 그를 ‘2012세계기념인물’로 꼽은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다산 선생이 200년 전 당시의 조선사회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세계 인류사회에 남긴 위대한 학문적 업적 때문이다.

다산의 걸출한 학문에 대해, 한마디 ‘헌사(獻辭)’를 붙인다면 어떤 말이 가장 적합할까? 이에 필자는 감히 ‘경국제세(經國濟世)’란 말을 떠 올려 본다. 조선후기 혼란을 거듭했던 시대, 국가기틀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이 바라는 세상’을 꿈꾸며 경세학(經世學) 곧 실학이라는 거대학문의 물줄기를 끌어 온 다산에게 그 말이 꼭 들어맞을 것 같다는 느낌에서다.

‘2012실학기행’ 일행 80여 명은 지난 9월초 2박3일간 계속된 여정 속에서 차량이동 중, 또는 강연회를 통해 ‘다산이야기’로 시종 함께했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다산에 대해 읽고 듣고 느낀 감회나, 생애를 바쳐 이룩한 대학자의 성과에 대해 돌아가며 한마디씩 남겼다. 일행은 한결같이 다산에 대한 흠모와 어둡던 한 시대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데 대한 안타까움,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마침내 대학자로서 우뚝 선 선생의 인생여정에 끝없는 찬사와 경하의 말들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이왕 다산실학기행에 나선 김에,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200년 시간여행’도 겸해 답사를 떠나 보기로 하자. 

   
다산실학의 상징인 다산초당(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200년 전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1958년 폐가로 쓰러진 것을 윤씨문중(윤선도 후손)서 복원하면서 기와집으로 재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실학’은 다산이 인류사회에 남긴 큰 업적
때는 1801년 11월23일경(음력), 우리일행은 ‘대역죄인’의 올가미를 뒤집어 쓴 채 유배의 몸으로 강진까지 끌려온 다산 정약용(40세)을 만나보게 됐다. 얼마 전(1799년·38세)까지 병조참판·형조판서 벼슬에다, 정조대왕의 총애를 아낌없이 받아오던 조정대신이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면서 그 동안 숨죽이며 노려왔던 시기와 모함에 걸려, ‘죄인된 몸’으로 한양서 끌려와 강진읍 동구 밖 당산나무 옆 허름한 초가주막 앞마당에 당도했다. 읍마을 사람들이 구경삼아 우르르 몰려들었다. 밤이 되자 다산이 갇힌 옥문을 발로 차고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주막집 노파의 배려로 주막 한켠 골방에서 귀향살이를 하게 된다. 얼마 후 다산은 이 허름한 골방을 ‘사의제(四宜齊)’라 이름 붙이고 글방으로 삼았다. 생각, 행동, 용모, 언어 네 가지를 늘 바르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황량한 유배지에서, 다산의 학문은 이렇게 고독하고, 한없이 초라한 가운데 시작하게 되었다.

강진읍 주막집 한 켠에 마련한 ‘사의제’가 ‘상례’연구의 산실이었다면, 몇 년 뒤 인근 백련사 혜암스님이 마련해 준 거처 ‘고성사’는 ‘주역’연구의 산실이었다. 뒤이어 마련된 거처 ‘다산초당’에서는 ‘경세유포’를 비롯해 ‘목민심서’ 등 수많은 경세학연구서를 저작하게 된다. 다산은 울적할 때면, 이곳 다산초당 옆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눈 아래 펼쳐지는 구강포(九江浦) 앞바다를 바라보며, 남서해상 고도(孤島) 흑산도로 유배가 있는 4살차이 둘째 형 손암 정약전(1758~1816)을 그리곤 했다. 손암 형은 다산의 저작에 대한 해박한 분석과 조언을 해 주는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 “마음붙여 살아갈 것이라곤 필묵 뿐”
다산의 학문적성취가 남달리 뛰어난 것은, 그가 평생을 다해 이룩한 500권의 방대한 저술작업들이 한 인간으로 그처럼 견디기 힘든 혹독한 시절 귀양살이 중에 완성됐다는 점이다. 유배 초기, 다산은 자신의 애닮은 심경을 담아 두 아들 앞으로 편지를 써 보낸다.

나는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있는지라
마음 붙여 살아갈 것이라곤 오직 글과 붓이 있을 뿐이다.
문득 책의 한 구절이나, 마음에 드는 한 곳을 만났을 때
다만 혼자서 읊조리거나 감상하다가 이윽고 생각하길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희들에게나 보여줄 수 있겠다 여긴다(중략 )

폐족이 되어 사람들이 너희를 천하게 여기고
세상에서 얕잡아 보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열심히 배우지 않고 스스로를 포기해 버리면
내가 해 놓은 저술과 간추려 놓은 것들은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으로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

‘두 아들에게’ 1802년 12월22일

임술년(1802) 한해를 마무리하려는 뜻에서였던지, 다산은 두 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유배생활 1년을 보내고 난 후에 쓴 글이었다. ‘몰락한 집안 자식으로, 그나마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일 한 가지밖에 없다. 독서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이다’ 라는 말로 극구 ‘학문’할 것을 권하고 있다. 폐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벼슬길마저 막힌 두 아들을 훌륭한 선비로 키워내려는 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이 묻어나는 편지였다.

온 천지에 의지할 곳 없어 한없이 외롭지만, 유배살이 동안 ‘오직 글과 붓’만을 의지해 저술한들 세상에 누가 이를 보고, 누가 책으로 엮고 정리하겠느냐며 탄식하는 대목에 가슴이 아려온다. 다른 한편, 그 글속에 다산의 학문연구에 대한 불타는 심경이 담겨있기도 하다. 부자간 서신으로 나눈 이 대화 속에 다산학문 전체를 꿰뚫는 고뇌와 방향, 핵심이 담겨있다고 본다. 혹독한 유배시기를 보내면서도, 다산실학의 혼(魂)은 그렇게 태동해 가고 있었다.

   
초의대사가 그린 다산초당의 모습.
 
   
초당 안에는 다산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 유배살이 중 ‘다산실학의 혼’ 태동
‘다산학’은 자신의 관료시절과 6경4서의 경학 등을 경험론적 시선에서 집대성해 정립된 학문이다. 실학은 고대 중국 공자, 맹자의 유학사상과 철학을 대표하는 경전에 새로운 주석을 바탕으로, 또한 중세의 관념론적인 성리철학의 세계관, 인성론에서 탈피해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하는 실용적 학문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 같은 논리위에 실행(實行)을 앞세운 것이 다산의 ‘실천철학’이자 ‘사상체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본윤리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닦이면 다음단계도 절로 열린다고 하는 것이 바로 다산철학의 중심이다.

실학자요, 철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실학’을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의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에 비견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칸트 저작 가운데 인간의 존엄을 가장 명징한 언어로 구사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 ‘실천이성비판’이 그것이다. 물론 보다 많은 학자들은, 칸트의 9서5제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순수이성비판’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인 중에, ‘칸트 저작에서 딱 1권’을 택해 읽는다면 ‘실천이성비판’ 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가를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자기시대의 철학적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한때 서학(천주교)이라는 외래사상을 이용하고 ‘경험철학’의 어떤 지점에 이끌어와 창조적으로 변용하고 종합해내고 있다. 그는 외래사유를 활용하는 전략으로 ‘실천철학’의 지평을 확대하고 지지의 토대를 보강하고자 했다.

▣ 다산 ‘실학’은 칸트의 ‘실천이성’에 필적
다산은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사유체계를 가장 잘 방증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양인의 사유체계를 가장 잘 표현한 학자 역시 그다. 실학자적인 입장에서, 중국서 전래된 서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가 하면 고대와 근대 동양사상과 철학을 망라한 6서4경을 관통했고 이를 수정보완해 경학서(經學書)로 완성한 학자이기도 하다.

다산은 19세기 말, 당대에 제기된 많은 국가사회 문제와 백성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비판하면서 수 많은 연구저작물을 발간하였고, 경학(經學)을 인간학적 측면에서 재정의하여 ‘실학’이라는 학맥의 저변을 인류에게 남겼다. 다산의 꿈은 동양의 경학사상을 ‘실천학문’으로 변모시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고루 돌리어 행복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산과 거의 동시대 학자로 활동해 온 칸트도 ‘실천이성비판’을 내세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연구·정의하고, 소외받은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가졌던 학자로 분류된다. 칸트에게 철학은 ‘모든 가능한 것의 과학’으로 규정된다. 이 또한 다산사상과 맥을 함께 한다. 칸트철학은 인간행위를 두 가지 방향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하나는 존재론 우주론 합리성 심리학이 속하는 ‘이론철학’이며, 다른 하나는 윤리학 경제학 정치학이 포함된 ‘실천철학(Practical Philosophy)’ 이다. 칸트는 또 ‘좋은 사회냐, 아니냐에 대한 대답은 소외 계층의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느냐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산초당 동편으로 100여m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구강포 앞바다. 다산이 독서와 저술에 지칠 때나 흑산도로 유배간 형님과 고향의 처자가 그리울 때 이곳에 서서 눈앞에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다산초당 왼쪽 뒷편에 보면 물이 흘러나오는 샘이 있다. 돌들이 촉촉히 젖어있던 자리를 다산이 직접 파내어 샘을 만들었고, 약천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 ‘다산학’의 현대성 연구 및 조명 절실


칸트의 ‘실천이성’은 6경4서를 통달하고 근현대 동양철학을 재조명한 다산이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 칸트의 글을 보노라면, 그 보다 약 30년(1세대) 후세 학자인 다산이 학문적으로 그의 ‘실천철학’을 ‘실천학문(실학)’으로 계승했던 것 아닌가 싶은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다산 정약용의 ‘실학’에 대한 연구는 올해 장 자크 루소, 헤르만 헷세 등과 함께 ‘세계기념인물’ 반열에 오른 것을 계기로 향후 더욱 봇물을 탈 것으로 보인다. ‘다산학’이 종래 동양철학 및 사상체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 의제이자 메뉴였다면, 이후로는 앞의 글 다산-칸트의 공통논제라 할 수 있는 ‘실천철학으로서의 유학(儒學)’에서 보듯 ‘동-서철학 비교’ 대상으로 적합할 다산학에 대한 연구 폭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다산실학이 태동한지 200년이 지난 오늘날, ‘왜 다시 다산인가’ 의아 할 정도로 다산연구가 부쩍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니, 그 배경과 원인에 유념하고 현상 및 방향에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정부와 학계가 ‘21세기 다산실학의 현대적 조명’에 보다 관심있게 주목하고, 종합연구에 박차를 가해야 할 필요와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할 것이다

 

========================================================

“부럽구나 저 기러기 … ” 흑산도·강진에서 끝내 재회 못한 형제

다산 탄생 250주년 … 실학기행을 떠나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의 동쪽 언덕에 세워진 천일각(天一閣)에서 바라본 강진만 풍경. 다산 정약용은 흑산도에 있는 둘째 형 손암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서울에서 전라남도 강진까지. 잘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도 네 시간이 넘는 거리다. 1801년(순조 1년) 11월,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과 그의 둘째 형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은 통곡하며 이 길을 지났다.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에 연루돼 셋째 정약종(1760~1801)은 처형을 당하고,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라는 어명이 내려진 것이다.

열흘 넘게 걸려 전남 나주에 도착한 형제는 밤남정이라는 주막집에서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

다산은 시 ‘밤남정 주막집의 이별’ 에서 이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없어/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전남 강진과 흑산도는 실학자 정약용·약전 형제의 유배살이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땅이다. 지난 8~9일, 다산연구소와 관훈클럽이 주최한 ‘실학 기행’을 따라 형제의 발자취를 뒤쫓았다.

올해는 특히 개혁사상가였던 다산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 강진과 흑산도에는 다산의 삶과 철학을 되새기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건너고 싶어도 배와 노 없으니=먼저 손암의 유배지인 흑산도로 향했다. 목포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2시간, 당시로는 배로 보름이 걸려야 도착하는 오지였다. 동생과 헤어져 흑산도로 떠나온 손암은 15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다 죽음을 맞았다. 다산은 형이 그리울 때면 다산초당의 높은 언덕 위에 올라 ‘부럽구나 저 물오리와 기러기/창파를 차고 잘도 나는구나’(‘가을날 약전 형님을 생각하며’ 중)라고 읊었다.

손암이 머문 곳은 흑산도의 외딴마을 사리(沙里)였다. 비록 귀양 온 몸이었지만, 손암은 이 섬을 사랑했다. 주변 어부들의 힘을 빌어 흑산도 연해 어류와 식물들의 이름을 정리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그가 섬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는 복성재 인근에는 현재 유배문화공원이 조성 중이다. 흑산도의 비바람 때문에 초가지붕이 자주 날아가, 서당의 지붕을 콘크리트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약용

 

◆다산 철학이 완성되다=형을 떠나 보낸 아우는 강진에 도착해 18년간의 귀양생활을 시작한다. 유배 초기, 대역죄인인 그를 도우려는 사람이 없어 동네 주막집 단칸방에서 4년여를 살았다. 머물던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중후하게’ 라는 원칙을 정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은 “이곳에서 서민들을 직접 만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실감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805년 지은 ‘송별’이라는 시에서 다산은 “우리나라 어찌하여 어진 사람 벼슬길 좁아/수많은 장부들 움츠러들어야 하나(중략)/평안도 함경도 사람들 늘 허리 머리 숙이고/서민들은 죄다 통곡을 하네”라며 조선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다. 2007년 강진군이 복원한 사의재에는 작은 주막이 영업 중이다. 마을 주민과 관광객이 잠시 숨을 돌리는 곳이다.

인근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다산이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난 1818년까지 10여 년을 생활한 곳이다. 그는 방 안에 책 1000여 권을 쌓아놓고 연구·저술 작업에 매진했다. 1818년 완성한 『경세유표』 서문에서 다산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공무원들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하는 『목민심서』,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흠흠신서』를 완성했다. 산중에 유배된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날카로운 현실인식과 명쾌한 대안은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큰 울림을 준다.

 

◆따뜻한 아버지로서의 다산=9일 오후 늦게 찾은 다산초당에서 어린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산의 외동딸이 시집 간 윤씨 가문의 후손 윤동옥(55)씨가 초당의 구석방을 빌려 어린이들에게 다산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키우며 충실한 나날을 보냈지만,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만은 숨길 수 없었던 듯 하다.

귀양간 아버지 때문에 벼슬길에 나설 수 없는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어도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라며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하고 궁리하여 진면목과 바른 뼈대를 얻으라”고 충고했다. 1812년 외동딸이 시집을 가자 부인 홍씨가 보낸 헌 치마를 찢어 그림을 그리고 “꽃도 이제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주렁주렁 맺으리”라고 축복했다.

 

굴곡 많았던 삶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인생의 비극이었던 유배시절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했다. 다산 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은 고단한 귀양살이에도 늘 자신을 채찍질하며 열성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벼슬길을 차단 당하고, 온갖 수모와 고난을 무릅쓰고, 오히려 이제 겨를을 얻었다고 즐거워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던 그의 치열한 삶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공간이야기 > 여 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흘러가는 구름따라 걷다  (0) 2012.10.12
가족 수학여행지 32선’   (0) 2012.10.12
한정식  (0) 2012.10.12
꾼들의 여행 - 손맛10 선  (0) 2012.10.10
어떤 소스로 맛낼까…행복한 고민이 시작됐다  (0) 2012.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