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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은 부산의 미래

by SL. 2013. 10. 13.

2013-09-01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1>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떠나는 사람들 

김해평야 산증인들 무관심한 세상 향해 소리 없는 절규

 

부산 강서구 대저2동에서 토마토 농사를 짓는 이철호(56) 씨가 에코델타시티 개발로 고향을 떠나야 하는 농민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다.

 

 

◇ 토마토농사 이철호 씨

- 대 이어 25년째 '짭짤이' 재배
- 개발 탓 모든 것 내려놔야
- 농민 생계대책 뒷전에 허탈

◇ '흙사람' 허혜경 작가

- 들녘과 석양에 반해 정착
- 주민들의 모습 예술로 승화
- 시골의 정서 소멸 아쉽다

 

'바닷물과 만나는 강 하구의/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그 재첩들은… 낙동강의 하수구가 하나, 둘,/ 그리고는 헤아릴 수 없이 늘어 가면서/ 어떤 놈들은 섬진강으로 이사를 가고/ 어떤 놈들은 강바닥에 껍질만을 남긴 채/ 몇천 년 몇만 대를 이어온/ 낙동강에서 사라져 갔단다… 낙동강에 재첩이 살았다는 것조차/ 어느덧 전설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나 재첩이나 낙동강 빨아 먹고 자란/ 한 뱃속 솜붙이인 것을/ 낙동강 바닥에서 떼죽음 당한 재첩들의/ 서러운 운명은/ 사람들의 앞날과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니… 낙동강가에 살았다는 것만 어느덧 전설이 되어버릴 것이니'. (박채화 시인의 '낙동강의 전설' 중)

낙동강 삼각주 갈대밭을 옥토로 바꾼 농민들, 오로지 강만 바라보며 고기잡이에 한평생을 바친 어부들. 이들 모두 가까운 미래에 실체 없는 전설로만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그렇지 않을 거라고. 강줄기마저 돌려놓은 문명의 욕심이 삼각주의 역사를 빠르게 지워버리고 있으니.

■모래톱에 터 잡다

을미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일본인들은 비옥한 낙동강 삼각주를 점유하기 시작했고, 1916년 대저수리조합이 설립되면서 김해평야 시대가 도래했다. 대규모 곡창지대가 형성된 건 1934년 서낙동강에 대저·녹산수문이 생기면서부터다. 지금 삼각주 농민 대부분도 이때를 전후해 태어났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아버지가 살았던 땅에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산 강서구 대저2동에서 25년째 토마토 농사를 짓는 이철호(56) 씨도 아버지의 대를 이었다. 198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홀로서기를 했다. 삼각주는 기회의 땅이었다. 강이 쌓아준 충적토는 비옥했다. 또 바다에서 올라온 염분 섞인 물은 오히려 토마토의 당도를 높였다. 여기에다 대를 이은 노하우는 '짭짤이토마토'라는 부산의 명물을 탄생시켰다.

대저토마토는 매년 8월 20일께 파종을 시작해 10월 10일 안에 마친다. 또 다음 해 2월 10일~5월 20일 수확하며, 봄철에 딴 토마토가 가장 맛있다. 이 씨의 토마토 재배 면적은 3600평(1만1900㎡)가량. 대저2동 토마토 농민의 평균 경작지는 2000~3000평(6600~9900㎡) 정도다.

이 씨는 이 땅을 일궈 자식 셋을 키웠다. 첫째 딸은 시집을 갔고, 둘째 딸은 대학원 공부 중이다. 막내아들도 벌써 대학교 2학년이다. 교통도 불편하고 자녀들의 통학거리도 멀었지만, 삼각주의 품을 떠날 수 없었다. 한때 '월급쟁이'로 '사장님'으로 잠시 외도했던 같은 마을 형님·동생들도 지금은 대부분 돌아와 고향을 지키고 있다. 

농민들에게 순탄한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여름철 태풍·장마 때는 홍수와 싸워야 했고, 겨울철 쏟아지는 눈은 비닐하우스를 폭삭 주저앉혔다. 이곳 90여 토마토 농가는 2003년 태풍 매미와 지난해 폭설 피해를 아직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에코델타시티 개발로 언제 떠나야 할지 몰라 큰돈을 들여 비닐하우스를 손보기도 어렵다. 특히 80% 이상이 임대 농민들이라 지주들이 언제 땅을 비워 달라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대를 이은 농민들은 대다수가 50, 60대다. 한창 자식들 밑에 돈이 많이 들어갈 나이다. 농가 부채도 만만찮다. 그러나 이제 모든 걸 놓고 떠나야 한다. 이들이 홍수와 싸워 갈대밭을 개간한 건 대역사였다. 그리고 지금 이곳엔 에코델타시티라는, 성격이 다른 대역사가 다시 진행되고 있다. 김해평야 산증인들이 무관심 속에 잊히고 있다.

농민들은 영구적 보상을 원하고 있다. 이 씨는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서 자랐고 땅을 개간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생계대책을 논의하기도 전에 지질조사나 환경영향평가를 한다"며 "농민들은 공황상태다. 도무지 앞날을 알 수 없다"고 허탈해했다.

■어머니의 품 같다

   
에코델타시티 개발 예정지에 포함된 부산 강서구 강동동 흙사람 작업실 '소담재'에서 허경혜 작가가 자신이 빚은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권혁범 기자
삼각주의 너른 품은 토박이들에게만 열려 있었던 건 아니다. 세상에 지치고 상처받은 외지인들에게도 어머니 같은 역할을 했다.

평강천 인근 강동동 '소담재'에서 흙사람과 도자기를 빚는 허경혜(62) 작가가 대표적 사례다. 그녀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1982년 유학 가는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지점토 인형작가 사토미키 선생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사토미키 선생에게 흙사람 빚는 법을 배운 허 작가는 1985년 귀국했다. 당시 우리나라엔 지점토 공예가 붐이었지만 그녀는 흙사람 만들기를 고집했다. 스승을 찾기 어려워 인체해부학이나 정밀묘사 관련 책을 보며 독학했다. 그녀에게 흙사람은 삶의 표현이고 거울이었다.

그러나 흙사람 만들기에 푹 빠져 소원해진 남편과 이혼하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두 남매를 데리고 사하구 하단·괴정, 김해공항 뒷골목 등지로 생활비가 적게 드는 곳을 찾아 전전했다. 

1997년 파밭이 펼쳐진 낙동강 하구 명지동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산이 없어 황량했지만 들녘이 있고 석양이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의 정이 넘쳤다. 드디어 그녀에게도 평온이 찾아왔다. 삼각주에서 묵묵히 살아온 어머니·아버지의 모습은 작품 소재가 됐다. 

그녀는 2003년 지금의 소담재에 완전히 정착했다. 하지만 허 작가는 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에코델타시티 개발로 곧 소담재가 헐린다. 그래도 그녀는 낙동강을 떠나기 싫어 인근 명지국제신도시를 보고 있다. 그런데 신도시 쪽은 워낙 땅값이 비싸 고민이 크다. 

허 작가는 "낙동강과 삼각주에 인생을 걸고 산 사람들이 이젠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이곳에 도시를 만들려면 5년가량 걸린다는데 지금 50, 60대인 주민들이 다시 정착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여기서 들녘을 보고 나무도 키우고 작품을 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됐다. 더는 시골의 정서를 느낄 수 없다는 게 제일 아쉽다"고 말했다.

그녀는 매달 넷째 주 월요일 작업실 옆 찻방에서 가까운 사람들을 모아 차회(茶會)를 연다. 차를 마시며 느낌을 나누는 자리다. 매주 월요일엔 스님을 모시고 직장인 등을 대상으로 다도를 가르친다. 남아 있는 시간이라도 소중하게 활용하려는 거다. 그렇게 허 작가는 삼각주 시골 마을에서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 낙동강 삼각주

- 500년 전 형성 추정… 조선시대 염전 성업

지질학자들은 대부분의 낙동강 하중도와 연안 사주들이 출현한 시기를 약 500년 전으로 본다. 삼각주 지형이 근대 지형도에 나타난 건 1900년대 초이지만, 이보다 앞선 대동여지도(1864년)에도 대저도 명호도 등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대동여지도는 삼각주의 지형 발달 과정을 확인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낙동강 하구(부산 강서구)는 원래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인 옛 김해만 입구의 저습지다. 오래전 지금의 다대포에서 내륙 쪽으로 깊숙하게 바다가 들어와 있었는데, 이 지역을 김해만이라 부른다. 즉 현재 낙동강 삼각주가 자리를 잡은 곳은 과거 바다였다. 가야시대를 지나 조선 초기까지 배를 타고 다니던 곳이다.

기록에선 낙동강 하구의 염전도 볼 수 있다. 조선 세종 6~7년 경상감사 허연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 김해부읍지에는 '명지 사람들은 소금 굽는 일을 생업으로 한다'고 적혀 있다. 명지염전은 1935년 휴업의 비운을 맞는다. 이때까지 명지소금의 연간 생산량은 100㎏들이 10만 가마였다고 전한다. 염전은 해방 후 뜻있는 사람들이 복구했지만, 1960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자문위원

김경철(습지와새들의친구 습지보전국장) 김상화(낙동강공동체 대표) 김승환(동아대 조경학과 교수) 반용부(부산대 환경연구원 특별연구원·전 신라대 인문사회과학대학장) 주경업(부산민학회 회장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30902.220032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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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0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2>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서낙동강 나루의 추억

막배 놓친 사람들 주막서 공짜 잠 … 그믐밤 갈대숲 참게잡이 장관

 

 

 

 

- 삼각주 나루 70여 개 추정
- 보부상·학생·아낙들로 복작
- 처녀·과부 뱃사공 물길 갈라
- 상수도관 '워터파크' 역할
- 번성하던 상가·대중문화
- 곳곳에 다리 놓이면서 쇠퇴
- 북섬·해창·신노전 등만 흔적
- 몇 곳 복원·생활사 조사를

"막배 가요, 막배!"

오후 9시. 처녀 뱃사공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부산 강서구 대저동 서연정마을을 바쁘게 돌았다. 하루 치 장사를 끝내고 얼큰하게 취한 보부상이 헐떡거리며 주막을 뛰쳐나왔다. 밤늦게까지 여자친구와 놀다 때를 놓친 대학생도 허겁지겁 나루로 향했다. 붕어를 가득 잡은 낚시꾼도 아쉬움을 달래고 낚싯대를 걷었다. 아랫동네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아낙네도 농업용수로를 따라 나룻배를 향해 내달렸다.

"자, 이제 물 건너갑니다."

뱃사공은 노를 저었다. 막배는 서낙동강 물길을 가르며 경남 김해시 대동면으로 떠났다. 북섬나루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막배를 놓친 사내 몇몇이 나루 바로 옆 주막에 모였다. 이들은 막걸리 한 사발씩 들이켜고 나서는 주막에서 공짜 잠을 청했다. 30~40년 전 북섬나루는 언제나 복작거렸고, 사람 사는 냄새로 가득했다.

■삶을 이어준 뱃길

   
1970년 녹산수문 근처의 나루에서 학생들이 나룻배를 타고 통학하는 모습. 부산 경일중학교 졸업앨범

낙동강 삼각주는 충적평야라 산이 없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나무를 구할 수 없었던 대저 사람들은 대동으로 건너가 땔감을 마련해 나룻배로 싣고 왔다. 북섬나루는 대저와 김해를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대저엔 묘를 쓸 곳도 없었다. 그래서 대저 사람들은 서낙동강 건너 대동에 조상을 묻었다. 이 때문에 북섬나루는 명절 때면 성묘객으로 종일 북적였다. 번호표를 발행해 배 타는 순서를 정하기도 했다. 당연히 주막은 흥청거렸고, 주모는 신이 났다. 막걸리와 삶은 달걀이 엄청나게 팔렸다.

서낙동강을 가로질러 놓인 상수도관도 기막힌 역할을 했다. 개구쟁이 어린이들은 이 좁은 관 위를 뛰어다니며 강을 건넜다. 그러다 지치면 강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다이빙 실력을 겨루기도 했다. 낚시꾼들도 상수도관에 자리를 잡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북섬나루 자리는 1970~1980년대만 해도 팔뚝만 한 붕어와 잉어가 예사로 낚이는 황금어장이었다. 이 상수도관은 대저가 부산시에 편입될 때 식수를 김해공항까지 끌어오기 위해 만든 것인데, 지금은 기능을 잃고 흉물로 방치돼 있다.

북섬나루는 다행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나루의 전설, 주모 문덕조(81) 할머니도 예전 주막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 할머니는 "옛날엔 정말 대단했다. 장사가 잘될 땐 달걀 10판(300개)을 삶아 하루에 다 팔았다"며 "처녀 뱃사공도 과부 뱃사공도 있었다. 지금은 한적한 곳이지만, 그땐 사람으로 넘쳐났다"고 회상했다.

나루엔 물류도 오갔다. 북섬나루에서 서낙동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지금의 강동교 밑에 해창나루가 있었다. 이 나루는 강동동 덕포마을과 강 너머 가락동 죽림리를 이었다. 가락중학교 학생들이 이용한 '통학나루'이기도 했다.

해창나루는 무엇보다 범선과 발동선이 오가는 상업항구로 번창했다. 규모도 컸다. 이곳엔 특히 오일장인 가락장터가 섰고, 장이 열리면 가락오광대가 한바탕 신명 나게 놀았다. 음식점과 숙박업도 번성했다. 김해평야 곡물의 집산지여서 정미업도 흥했고, 밤마다 술판이 이어졌다.

크기는 작았지만, 매우 요긴했던 신노전나루도 있었다. 평강천과 샛강을 사이에 두고 세 갈래로 갈라진 대저동(신노전마을)·강동동(천자도마을)·명지동(순아마을)을 삼각형 모양으로 연결했다. 에코델타시티 사업부지의 한가운데다. '신노전'은 '새 갈대밭'이란 뜻으로, 원래는 갈밭 천지였던 곳이다. 삼각주 아래쪽 동네에서 부산 시내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 버스를 타야 했다. 시내 학교로 통학한 학생들은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씩 걸려 밤이 깊어야 집에 닿았다.

세 마을을 잇다 보니 물가엔 주막들이 빙 둘렀다. 밤이면 수군수군 재잘재잘 이야기 소리가 강가를 메웠고, 술주정과 싸움도 끊이지 않았다. 현재는 대저동 신노전경로정 앞에서 흔적을 볼 수 있지만, 나루터 자리는 대부분 강 쪽으로 10m 이상 토사가 쌓여 땅으로 변했다.

■소통과 교류의 상징

   

향토사학자들은 낙동강 삼각주에 형성됐던 나루를 70여 개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흔적이나마 남은 나루는 북섬·해창·신노전 등 네댓 곳뿐이다.

나루는 그 시절 소통과 문화 교류를 책임졌다. 민속·생활사·마을소식·교육·대중문화 등이 뱃길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대부분 섬이었던 삼각주는 나루를 통해 같은 문화권을 형성했다. 육지의 문화가 물로 떠나고, 물과 뭍의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기도 했다. 삼각주 주민은 흔히들 문화와 생활사를 "퍼 날랐다"고 표현한다.

삼각주 곳곳에 다리가 놓이면서 문화는 급속도로 전파됐지만, 절대 머무르진 않았다. 빠르게 전달된 문화는 정착되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나루 근처엔 집과 주막이 빽빽이 들어서 문화를 모았지만, 다리 인근엔 모든 것이 사라졌다. 편리한 만큼 정도 메말라 버렸다.

나루엔 낭만도 흘렀다. 당시의 나루엔 갈대가 지천이었다. 강폭도 훨씬 넓었다. 물결이 찰랑거리고, 거기에 비친 달은 잔잔히 흔들리며 춤췄다. 바람 따라 일렁이는 갈대도 멋졌다. 그믐밤이면 참게를 잡으려고 너나 할 것 없이 횃불을 들고 갈대숲을 뒤졌는데, 그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처럼 풍류 넘쳤던 서민의 생활상도 다리가 놓이면서 볼 수 없게 됐다. 나루터 주위 옛길도 흔적이 없다. 대신 새로 뚫린 신작로만 남았다.

전문가들은 여전히 나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삼각주 주민의 삶과 문화가 집결된 나루를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에코델타시티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황규성 전 강서문화유적보존회장은 "에코델타시티 예정지는 예부터 들녘이 많았고 나루와 포구도 발달했다"며 "이를 중심으로 한 삼각주 주민의 생활사를 조사하면 김해평야의 다양한 이야기를 보존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대표적 나루 몇 곳을 복원하자는 제안도 나온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은 "구포·북섬나루는 현대판 나루로 복원 가치가 있다. 이용의 편의도 있고, 즐길 거리도 된다"며 "다리 등 다른 교통수단을 원활히 하면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노 젓는 배가 대표적, 통통배·범선 등 다녀…승객이 줄로 끄는 배도

■ 낙동강 하구 나룻배

낙동강 삼각주 섬들을 이어준 나룻배는 노 젓는 배가 대표적이다. 통학하는 학생이나 보따리상, 나들이객, 짐꾼 등을 싣고 다녔다.

규모가 큰 나루에선 세월이 흐르면서 발동선이 등장했다. 해창나루 등지에서 30명 이상을 태웠다. 나중에야 디젤 엔진이 달렸지만, 첫 발동선엔 방앗간에서 쓰는 모터가 사용됐다. 이 배는 '통통' 떨렸고, '통통'거리는 소리도 컸다. 이 때문에 삼각주 사람들은 '통통몰이' 또는 '통통배'라고 불렀다.

학자들도 잘 모르는 사실. 낙동강 하구엔 줄로 끄는 배도 있었다. 강폭이 좁아 뱃사공이 필요 없을 땐 강 양쪽에 튼튼한 쇠밧줄을 매어 배 위에서 승객이 직접 줄을 잡아당기며 나룻배를 움직였다.

무수한 작은 섬들 사이에선 삿대를 이용해 배를 저었다. 에코델타시티 예정지의 중앙 부분(천자도·순아마을 주변)은 원래 큰 섬만 여덟 개였다. 지금은 다 메워졌지만, 작은 섬들은 훨씬 더 많았다. 이처럼 거리가 얼마 안 되는 섬들 사이는 삿대배가 다녔다.

이 밖에도 명지염전이 성했던 때엔 소금을 100섬이나 실을 수 있는 덩치 큰 범선도 낙동강을 누볐다.

뱃사공은 면사무소에서 허가를 받아 나룻배를 운영했다. 2~3년에 한 번씩 입찰을 통해 운영권을 따냈다. 마을 사람들에겐 뱃삯을 따로 받지 않았다. 1년에 한두 번씩 쌀이나 보리를 받고, 평소엔 그냥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뱃사공이 얼굴을 모르는 외지인들은 반드시 현금을 내야 나룻배를 탈 수 있었다.

뱃사공은 대부분 나루 바로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 배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강 건너에서 손님이 부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했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30911.2200619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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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7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3>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지켜야 할 전래민속

가락오광대·명지 알씨름·다대포 후리소리…민중문화의 보고

 

 

 

- 가락오광대 노름꾼 과장 특이
- '모찌기 노래' 등 노동요 성행
- 봉화산 정상 매년 봉수대제
- 민속박물관 만들어 보존해야

낙동강 물길을 따라 삶이 수천 년 이어져 오면서 수많은 노래와 놀이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전래민속은 이렇게 낙동강 삶터의 역사를 재현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노동요 굿판 제례 등이 최근 지역민의 노력으로 고증을 거쳐 복원되고 있다.

낙동강 하구 일대 강서와 구포의 전래민속들을 강서문화원과 낙동문화원, 부산민학회, 신라대 양혜경(국어국문학과) 교수의 도움말로 살펴봤다.

■문화의 보고 김해평야

영남 최대 규모의 곡창지대 김해평야는 현 부산 강서구 대저동 가락동 식만동 일대다.(1989년 경남 김해군에서 부산 강서구로 편입됐다) 동 이름에 주목해도 재미있다. '먹을 것으로 가득차다'는 뜻의 식만(食滿)동은 이곳이 풍성한 곡창지대였음을 드러낸다.

생산된 대량의 곡물이 집결되고 자연스레 돈과 사람들이 모이면서 민중문화도 활짝 꽃피웠다. 논에서 밭에서 또는 바다에서 일하면서 불렀던 노동요부터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 탈놀음까지 김해평야는 풍성한 문화의 보고이기도 했다.

부산 강서지역을 대표하는 민속놀이를 꼽으라면 단연 가락오광대다. 19세기 후반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현 부산 강서구 가락동) 죽림나루터에서 음력 정월대보름 밤에 연회되던 탈놀음으로 양반을 조롱하고, 파계승과 처첩 갈등을 풍자하며, 액을 쫓고 복을 불러들이기를 비는 세시풍속같은 놀이였다. 가락오광대는 곡창지대에서 수거된 농산물이 한 데 모이는 죽림나루터 장터에서 펼쳐져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락오광대는 경남 합천군 초계면 덕곡리 밤마을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같은 가면극이지만 낙동강 동쪽은 주로 '야류'라 불렀고 서쪽은 '오광대'로 불린 것이 특징이다. 종가양반 애기양반 말뚝이 포졸 할미 등 28명이 등장하며 총 6과장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2과장인 노름꾼 과장이 특이하다. 다른 지역 오광대와는 달리 노름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노름꾼들이 노름을 하던 틈을 타 절름발이 어딩이가 노름판 돈을 훔쳐 달아나다 포졸에게 붙잡혀 끌려간다. 노름꾼은 처벌하지 않지만 도둑은 엄벌한다는 것으로 노름에는 관대하지만 도둑질은 반드시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락오광대는 1930년께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쇠퇴했다. 하지만 1936년 처음으로 구설을 채록한 이후 1970~80년대까지 수 차례 보완을 거쳤다. 2001년에는 지역민들로 구성된 가락오광대보존회가 결성되면서 복원 및 전승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곡창지대였던만큼 농요도 성행했다. 낙동강 유역 논농사 지역에서 가장 많은 유형이 전해지는 노래가 바로 모내기 노래다. 부산 낙동강 유역에 전래되는 다음 '모찌기(모를 내기 위해 모판에서 모를 뽑는 일) 노래'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겼다.

'바다강같은 이모맡이 장개판만치 남았구나/장기야 판이사 좋다마는 둘이없어 못두겠네/하늘에다 목화를 심어 목화따기도 난감하다/한강수에 모를부어 모찌기도 난감하다/남창남창 베루끝에 무정하다 저오랍아/나도죽어 남자되어 처자권석 섬겨볼래/바랑봇짐 반보따리 처가야집을 상해가네/각시님은 얼른보고 칠보야단장 고이하네'.

낙동강 하구로 내려가보자. 강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명지(부산 강서구 명지동) 일대는 예전에 알아주던 염전이었다. 조선시대 명호도(섬)로 불렸던 이곳은 유명한 소금과 김밭이었다.

이 지역에 전래되는 대표적 민속은 명지 알씨름이다. 낙동강 삼각주 지역 특유의 고운 모래사장에서 행해지던 명지 지역의 씨름으로 자신의 오른팔로 상대방의 오른쪽 무릎을 누르고 당기는 형태의 싸움이다. 100여 년 전부터 성행하다 일제 말 중단됐다가 해방 후 재개됐다. 주로 추석이나 설 등 명절 때 행해졌는데 농번기는 물론 농한기 때에도 염전 때문에 각처 소금 행상들이 오고가 바빴기 때문이다. 그나마 여유로운 시기는 명절 때였다. 명지 알씨름은 명지면 6개 부락을 동·서편으로 나눠 단체전을 주로 했는데 응원전도 대단했다.

강서구 생곡동 봉화산 정상에서는 매년 봉수대제가 치러진다. 봉화산 봉수대는 가덕도 천성봉수대로부터 소식을 받아 북쪽 김해 분산성 봉수대로 연락하는 임무를 띤 곳이다. 강서구가 1991년 이곳을 단일연조(연기를 피우는 곳이 한 군데)로 복원해 매년 10월 녹산향토문화관이 봉수대제를 지낸다.

■강의 끝 바다에서는…

낙동강이 끝난 지점 다대포 바다에는 어부들의 노동요가 전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다대포 후리소리. 다대포 후리소리는 부산시 무형문화재 7호로 지정돼 있다. 후리소리는 물고기를 잡으려 그물을 당기며 부르던 노래다. 삶의 한이 서린 다른 노동요와는 다르게 멸치잡이에만 집중하는 등 다소 건조하다. 그렇다고 단조롭지는 않다. 파닥파닥 뛰는 멸치 떼가 보이는 어선 위에 앉아있는 듯 역동적이다.

'동해바다 며러치도 다대포로 몰려오고/남해바다 며러치도 다대포로 몰려온다/서해바다 며러치도 다대포로 다 몰려온다/서해용왕님 은덕으로 멸치풍년 돌아왔네'.

강서문화원 배수신 원장은 "에코델타시티가 들어서면 김해평야가 사라지게 된다. 낙동강이 만든 이 일대의 역사와 전래되는 문화를 전래민속박물관을 만들어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반드시 전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 상업중심지 구포의 민속

- 구포선창가·별신굿·당산제 등 수많은 삶의 이야기 복원작업

   
부산 북구 구포동 대리 당산나무와 산신당, 고당각이 위치한 구포동당숲. 전민철 프리랜서 jmc@kookje.co.kr

1932년 건립된 낙동강 최초의 다리 구포교는 김해평야 일대에서 생산된 곡물을 구포로 집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부산 북구 구포는 낙동강 하구의 생산품과 돈이 모이는 거대한 물류와 상업의 도시였다. 구포에서는 지금도 5일장이 열릴 정도로 상업 중심지로서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구포(옛 지명 감동진)는 경남 합천 율지나루, 경북 상주 낙동나루와 함께 낙동강 3대 나루터 중 하나였다. 낙동강 출발지인 구포에서 하구 일대의 물품을 싣고 상주까지 700리를 거슬러 올라갔고 상주에서 집결된 물품은 다시 서울로 전해졌다. 배가 너무 많다보니 이중 삼중으로 배를 대는 건 흔한 풍경이었고 돈이 돌다보니 전국 최초의 지방 상업은행이 생긴 곳도 바로 이곳 구포다." 낙동문화원 이도희 원장의 설명이다.

각종 공물선 상선 어선들이 모였던 구포에는 대규모 선창(船艙)이 있었고 짐을 싣고 내리는 인부들의 노동요도 존재했다. '낙동강 칠백리에 배다리 놓아 놓고/물결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구포장(場) 선창가에 갈매기도 춤추네' 정도로 짤막하게 전해지는 '구포선창가'는 물류 중심지로서의 구포를 흥겹게 표현한다. 1930년대 구포교에서는 줄을 놓고 강서 사람과 구포 사람이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연초에는 10여 개의 당산제가 열리는데 그 중 대리 당산제가 대표적이다. 구포동에 위치한 구포동당숲(천연기념물 309호인 대리 당산나무가 있다)에서 정월대보름 자정을 기해 금정산 산신을 모시는 산신당과 고당할매를 모시는 고당각에서 당산제가 거행된다. 당산제를 지낸 다음 날 아침 지신밟기로 마을 일대를 돌면서 액을 쫓고 한해 안녕과 평안을 기원한다. 구포동당숲 관리인인 김학경(83) 옹은 "600여 년 된 대리 당산나무의 기운이 좋아서인지 무당들이 제를 지내기 위해 하도 많이 찾아와 문을 잠가두지 않으면 관리하기 힘들 정도"라고 전했다.

물자가 모이고 돈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다보니 액을 쫓고 복을 기원하는 굿판도 성대하게 펼쳐졌다. '구포(감동진)별신굿'는 마을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재앙을 막기 위해 매년 또는 격년으로 치러졌다. 지금은 구포별신굿보존회를 중심으로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구포별신굿은 다른지역 별신굿과 다르게 강신무(신내림을 받은 무당)가 연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 구포 5일장의 백미는 장타령, 즉 각설이 타령이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로 시작되는 장타령은 장바닥을 누비던 각설이들이 2~3인 한 조로 문전걸식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처럼 수많은 삶의 이야기와 흔적이 남아있는 구포나루는 에코델타시티가 챙겨야할 김해평야와 낙동강의 소중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30918.22005185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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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4>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1300리 역사의 발자취

수로왕의 로맨스, 이순신 장군 전승, 구포배 등 1700년 이야기 간직 

 

 

 

- 가야시대부터 삶의 터전
- 대저 일본식 과수원집
- 복원하면 훌륭한 관광자원
- 조성중인 에코델타시티
- 국적불명 명칭 부끄러워
- 인문·자연환경 담아내야

 

 

1700여 년 전 가야시대의 낙동강 하구는 수심 50~60m의 깊은 바다였다(현재 수심은 1m 내외). 이 시기 상류 지역에서 떠내려온 흙과 모래가 쌓여 바다 밑에서 땅이 서서히 올라오는데 이 땅을 '등'이라고 부른다. 지금 부산 강서구 남단에는 전등·경등·사취등·용등·대마등·장자도(옥림등)·진우도(왜섬등)·맹금머리등 등이 분포해 있다. 또 새부리등·진우동생등이 새로 솟아오르고 있다.

낙동강(522㎞)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경상분지를 적시면서 영남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해 왔다. 이 살아 숨 쉬는 땅에 '에코+델타+시티'를 건설한다고 한다. 그러려면 이곳을 흐르던 샛강들을 잘 찾아 복원하는 게 우선이다. 이를 위해 낙동강 1300리 물길이 간직하고 있는 인문·자연환경을 담아내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다음 강변에 아름다운 건물들을 세워 베니스나 쌍트페테르부르그를 능가하는 명품 강변도시를 건설한다면 세계에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농경의 시작

낙동강 삼각주는 조선시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4년)에 대저도·명호도 등 여러 하중도가 표기돼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 주민의 생활도 소개돼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전후로 일본인들은 낙동강 하구의 대저도 지역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당시 삼각주의 하천 부지는 지번과 지적이 없어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없었다. 1908년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대저를 중심으로 강변에 둑을 쌓아 홍수 피해를 임시로 막고 이 땅을 그들의 소유로 만들면서 일본인 농부들을 이주시켰다. 이곳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배수가 좋은 사질토에 배를 재배해 만주·일본 그리고 국내에 '구포배'라는 이름으로 수출·판매했다. 지금도 이곳에는 일본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 많이 남아 있어 과수원집 후손들이 찾아오고 있다. 낙후돼 가는 일본식 가옥들을 복원·수리해 '일본거리'를 조성하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1900년대 전후로 낙동강하구에 등(연안사주)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16~1957년 기간 중 17회의 대홍수는 막대한 양의 토사를 운반해 연안사주(울타리섬) 지형의 형성을 도왔다. 한편 1988년 낙동강 하굿둑이 건설된 후 연안사주의 성장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 다대포해수욕장 앞에도 새부리등이라는 모래섬이 생겨서 이곳 바다가 호수로 변하고 있다.

낙동강 삼각주에 농경이 본격화된 것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로 1930년대 대저수문과 녹산방조수문 그리고 낙동강 변에 대규모 제방이 축조된 이후의 일이다. 새로운 농경지가 생겨나자, 인근 산간 지역 주민이 삼각주로 대거 이주했다. 이주 당시에는 매년 큰 홍수로 갈대나 보리농사가 고작인 매우 고된 생활을 했고, 그때의 농민 중 생존자는 지금 90~100세가 됐다.

■국경을 넘은 로맨스

낙동강 삼각주는 고대 가야·조선의 역사와 문화가 간직돼 있다. 김수로왕과 허 황후의 로맨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전승 역사의 고장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결혼은 '가락국기'에 기록된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는 설화다. 김해 바다 서남쪽에서 공주를 태운 붉은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공주(허 황후)를 마중 나간 왕의 신하가 먼저 망산도(용원 선창 부근) 위에 횃불을 올려 뱃길을 밝히니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렸다. 허 황후 일행이 타고 온 돌배는 지금도 망산도 앞바다에 남아 있다.

이순신 장군의 다대포 해전(1592년 9월 1일 낙동강 하구에서의 해전)도 삼각주에서 펼쳐졌다. 난중일기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는 1592년 10월 5일 첫 닭이 울 때 가덕도를 출발, 심한 샛바람(동풍)이 부는 몰운대(다대포 해수욕장 끝)를 지났다. 이어 오전 8시께 화준구미(사하구 화손대 서쪽의 내만으로 추정됨)에서 왜적선 5척, 다대포에서 8척, 서평포에서 9척 그리고 절영도(영도)에서 2척 등이 모두 기슭에 줄지어 대어 있으므로 3도 수사가 거느린 여러 장수가 합력하여 24척 모두를 남김없이 격파하는 대승리를 거뒀다.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위해

우리의 오랜 역사가 간직된 땅, 강서구 대저도 일대에 에코델타시티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의 이름이 '에코+델타+시티'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의 옛 터전이다. 에코텔타시티라는 신도시 명칭이 국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잠시 유행의 물결을 탄 외국어 조합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오래 두고 불려야 할 이름인데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기우일까.

이 지역에는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 과거 이 땅의 내력과 주민 생활의 모습들을 문화유산으로 자랑할 수 있도록 천천히 찾고, 다듬고, 생각해야겠다. 특히 자연사 문화유산이 간직된 도시로 옛 자연과 샛강의 물길이 살아나고 생태환경이 공존하는 디자인을 만드는 여유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없는 신대륙의 황무지에 기하학적 직선 위주의 도시를 만드는 일이나, '빨리 빨리'라는 조급한 사고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단순히 경제적 유익만을 위한 도시는 막아야 할 것이다.
 
# 수많은 하중도 사이 거미줄 같은 샛강 흘러 

■ 삼각주의 내부 구조
- 퇴적층 두께 약 80m


   

영남의 어머니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에서 큰 발걸음을 시작, 부산에 이르러 모래와 흙을 쌓아 놓았다. 

삼각주 서쪽으로는 서낙동강, 동편으로는 동낙동강의 두 갈래로 나뉘어 흐른다. 이렇게 낙동강 유로에는 대저도·대사도·중사도·평위도·맥도·을숙도·일웅도·천자도·도도·동자도·송백도·죽도·작지도·순기도·서간도·유풍도·제도·명호도·순아도·수봉도·대부도·덕도·전양·사취등·경등·전등·신호도, 그 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하중도가 형성돼 있었다. 또 이 섬들을 비켜 지나는 거미줄 같은 샛강들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낙동강 하구는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로, 남해의 바닷물이 낙동강을 따라 삼량진·밀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전 옛날에는 이렇게 다대포에서 낙동강의 북쪽으로 깊숙하게 바다가 들어와 있었다. 이 해역을 김해만 또는 낙동포라고 부른다.

삼각주 평야가 자리 잡고 있는 부산 강서구 땅은 과거 바다로, 정몽주 선생은 김해에서 배를 타고 초선대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경남 김해시청에서 남쪽으로 멀리 펼쳐진 넓은 강서구의 평야는 조선 초기까지 배를 타고 다니던 바다였다.

신생대 제4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네 차례의 빙하기가 있었다. 빙하기에는 지구 기온이 낮아져 양극 지방이나 높은 산지가 거대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이때의 바다는 지금보다 130~140m 정도 낮아서 육지의 면적이 훨씬 더 넓었다. 그런데 약 2만 년 전부터 기온이 온화해지면서 빙하가 녹고 바닷물이 점차 불어났다. 해수면이 오늘날과 같은 높이까지 올라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이다.


   

낙동강 삼각주의 퇴적층 두께는 약 80m, 남·북 간 길이는 30㎞, 동·서 폭은 6~16㎞다. 

이 넓고 깊은 바다에 얼마나 많은 양의 토사가 쌓여 오늘날의 대평원이 만들어졌을까. 낙동강 삼각주의 지층 퇴적 단면을 살펴보면 바다가 올라오는 상승 경향이 일정치 않았음도 알 수 있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30925.2200618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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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1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1-5> 낙동강 삼각주 이야기- 살아 있는 생활사 박물관

'물 위의 집' 짓고 고기잡이, 채소 실은 통통배 시장으로 내달려

 

 

 

- 강가 지천으로 자란 갈대로
- 발·갈꽃빗자루 만들어 판매
- 채소밭 일구고 게 잡으며
- 조그만 하중도서 따뜻한 삶
- 이들 대부분 이젠 고인으로
- 녹산동 수참·조만강 범방대…
- 삶의 기억들 존치시켜야

1959년 겨울, 필자는 결혼하는 고향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강동동 제도리 천자도(이하 지명은 현재의 부산 강서구)에 갔었다. 조그마한 하중도(河中島, 삼각주)들이 물 위에 떠 있고 그 섬 중 한 곳의 신부집을 찾아, 녹산에서 나룻배로 건너고 다시 삿대를 이용해 섬 사이를 비집고 가야 했었다. 가지런한 갈대 울안에 정갈하게 지은 갈대집은 당시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토방에서 융숭한 우인 대접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술이 도도하게 오른 친구가 힘자랑한다고 삿대를 강바닥에 힘껏 찍어 배를 밀어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미처 삿대에서 손을 떼지 못해 그만 차가운 강물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신부집은 비록 강 한가운데의 오지에서 살면서도 주위 섬들에다 채소밭 일구고 갈대숲에서 갈게 잡아 풍족하진 않지만 따뜻한 삶을 살았다. 이제는 이 섬들이 서로 이어져 자동차로 오가는 보통 마을이 됐다.

■강안에 녹아 있는 삶

그동안 낙동강 역사를 찾아 하중도를 걸어서 답사하며 만난 어른들(이제는 대부분 고인이 됐다)도 "섬으로 시집와서 섬 밖으로 나가 본 일이 없다"며 "구차하게 살던 지난날들이 지긋지긋하다"면서도 향수(?)에 젖는 모습을 보았다.

강가에는 거룻배와 돛단배를 건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소가 있었고 낙동강으로 먹고사는 어부들이 많았다. 구포 어촌계 박남용(64) 씨는 아예 서낙동강 물가에 '물 위의 집'을 짓고 살면서 낙동강 어부가 돼 물밑을 꿰고 산다.

서낙동강은 일본강점기 고질적인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동)낙동강 양안에 일천식(一川式) 높은 제방을 쌓고 서쪽으로 휘어진 본래의 낙동강 물길에 수문(대동·녹산수문)을 설치, (서)낙동강 물을 가두어 농업용수로 쓰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수문을 두기 이전 서낙동강은 퇴적평야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의 남해안 보급로였다. 밤늦게까지 수확해 다듬은 채소를 실은 통통배들이 물길을 따라 형산진 녹산장으로 멀리 부산장으로 내달렸다.

■사라진 갈대밭 서정

   
1970년대 강서구 녹산의 갈새집. 갈대와 억새를 섞어 지붕을 인 집이다. 주경업 부산민학회장 제공
조선 후기 문인으로 남인의 촉망을 받던 청년학사 이학규가 신유곡사에서 천주교인으로 몰려 유배 생활한 곳이 김해여서, 유배 온 사람답지 않은 여유로움으로 낙동강 하류 일대를 유람하면서 강 사람들의 삶을 노래했다.

'갈대꽃 포구에 날이 어지러울 때/ 밤낮으로 시끄럽게 물새떼 꾸룩 꾸르르/ 서리 내려 벌레 울음 들려 즐거우니/ 모두 통발 보자기 들고 강변에 가네'.

흐르는 낙동강 물도 강변의 초가들도 숨소리를 죽였는데 갈대꽃이 물 위에 뜬 달을 희롱하는 포구의 정경이 그려지고 달밤에 통발 들고 게 잡으러 나가는 어촌의 여유로움을 그려내고 있다.

강가에 지천으로 자란 갈대는 이곳 사람들의 생활 원천이었다. 발을 짜서 만들고 삿자리, 삿갓, 갈꽃빗자루를 만들어 내다 팔았다. 갈대숲 사이로 갈게를 잡아 게장을 담그면 그 수입이 짭짤했다. 낙동강 하구는 갈대밭 천지였다. 수문설치 후 토사의 퇴적이 빠르게 진행돼 육지로 변하면서 고깃배 불도, 갈대숲도, 게잡이꾼들도, 낚싯배도 사라졌지만.

가락 남쪽의 남포도 그렇게 사라졌다. 몇 년 전 김해시 화목동에서 만난, 이곳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다는 최정자(당시 51) 씨는 "지금도 논바닥을 조금만 파 내려가면 갈대 뿌리가 지천으로 나온다"고 했다. 여기 사람들은 "전봇대를 논바닥에 거꾸로 꽂아두면 전봇대가 박혀서 사라져 버린다"는 우스갯소리를 예사로이 한다. 고려 원종 15년(1274년) 일본 원정길에 오르는 여몽연합군이 900여 척의 군선과 2만여 군대를 집결시킨 김해 앞바다가 서낙동강 남포 이곳이었을 터인데, 갈대밭 포구는 뭍으로 변해 논바닥이 되었고 넓고 큰 갈대숲도 사라져 버렸다. 조선 후기 김해군수를 역임한 김건수의 '남포어화(南浦漁火)'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냇가의 촌 늙은이 두어 칸 어부들 집/ 온종일 안개 낀 강변에 돌아가기 잊었네/ 밤이 오래도록 초승달 뜰 줄 몰라/ 관솔불 켜 들고 갈잎게 털러 가네'.

■역사를 간직한 포구

에코델타 시티를 계획하고 있는 서낙동강과 맥도강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평강천은 곳곳에 샛강을 둬 하중도를 흡족하게 적시고, 포구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삼포를 개항하기 전 녹산동 미음리 구랑촌에 뒀던 수참(水站)은 일본과의 무역거래가 이뤄졌던 곳으로 한·일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해 흥청거렸다. 가락동 죽림리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죽도성이 100m가량 흔적을 남기고 있다.

서낙동강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물목 녹산 성산동에 있었던 형산진은 명지로 부산으로 오가는 나룻배 길이었다. 명지동 순아2구 평강천에서 샛강으로 흘러 서낙동강과 만나는 들머리 마을에 있었던 남대포는 서낙동강 최남단 성산(녹산)과 마주 보는 당시 김해 가락면 제도리의 큰 포구였다.

조만포는 남해고속도로의 가락IC 남쪽 조만강 하구, 서낙동강을 낀 포구다. 옛 이름이 태야강인 조만강은 김해 주촌에서 발원해 해반천과 호계천, 금천을 만난 후 둔치도의 서쪽으로 돌아 생곡동 장락포를 지나서 서낙동강으로 흐른다. 남해가 만조일 때 바닷물이 이곳까지 올라왔었다고 조만포다.

조만강의 범방대는 그 옛날 죽암 허경윤, 좌랑 도처형 등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 시회를 열었던 곳이며, 죽림리에는 외침을 막기 위해 김해부사 이상경이 대변청과 화약고를 설치하고 전함을 배치했는데, 후에는 세곡 수납을 위한 해창(海倉)을 뒀던 곳이었기에 주요 군항으로 일반 백성의 접근을 금한 곳이기도 하다.

강바람에 펄렁이는 서낙동강 물결이 비단을 펼쳐 놓은 것같이 아름답게 보였다는 금파대도 해창 북쪽 오봉산 기슭(고정마을)에 있었다.

에코델타시티 계획을 입안하면서 이렇듯 여기 살던 사람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다. 서낙동강안에 사는 이들 특별한 삶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기억할 수 있게 존치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서낙동강 생활사 박물관'이다. 서낙동강 자연생활사 자료관이든, 서낙동강 사람들 이야기 자료관이든 심도 있게 기획하는 일을 우선으로 꼽아야 한다.

# 현대문학 속의 낙동강

- 김정한 '모래톱 이야기'
- 강인수, 고디꾼의 삶 그려

낙동강 시인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던 박현서는 연작 낙동강 시편을 44편이나 써 놓고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던 '푸른 물빛'을 가슴속의 기억으로만 품은 채 강물처럼 흘러가 버렸다.

'한때는 우리 모두/ 푸른 하늘도 들여 앉히고/ 한때는 우리 모두/ 푸른 강물도 들여 앉혔지/ 이제 더러는 이 시대와 세찬 물굽이를 거슬러 … 안아 들여도/ 마셔 보아도/ 내 안에 머물지 않고/ 흘러만 가는 내/ 푸른 물빛이여'. (낙동강 37 '푸른 물빛의 기억' 중)

어디 그뿐이랴. 부산의 소설가 김정한은 낙동강 변에 깔린 민중의 이야기를 소설로 형상화했다. '모래톱 이야기' '뒷기미나루' '산서동 뒷이야기' 등이 낙동강이 무대이자 주인공이었다. 늘 가난한 이웃 이야기를 글로 써온 작은 거인 정동수는 자서전적 격인 '평강리 1·2·3' 속에 어린 시절 가난을 평강과 함께 엮어내고 있다.

강인수의 장편소설 '낙동강'은 고디꾼들 이야기다. 소금배를 탄 고디꾼들의 삶을 그리면서, 겨울철 얼어붙은 강바닥 얼음을 삽질로 깨어 배가 지나갈 수 있도록 물길 틔우는 작업을 하다가 끝내 죽어간 17살 고디꾼의 이야기는 차라리 애달프기까지 하다.

   

고디꾼이란 바람이 약해졌거나 역풍이 불 때 돛단배에 고딧줄을 걸어 강변에서 잡아당겨 배를 움직이게 하는 뱃사람을 일컫는다. 도사공의 선창 소리에 줄꾼들이 '여기엿차 어기야' 소리를 한소리로 받으면서 당기며 힘도 모으고 고됨을 풀었다.

'이여이여차 이여이여차/ 이여차이여 이 카라가 이여차/ 잘못하면 이여차/ 부산 간다 이여차'. 이젠 고딧줄 소리를 아는 이도 없다. 명지의 옛 고디꾼은 구십을 넘은 나이로 옛이야기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찾아오마 약속드린 고디꾼도 그 사이 유명을 달리해 함안 조태호 고디꾼이 남긴 소릿말이 있을 뿐이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31002.22006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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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8

 

에코델타시티에 부산 미래 건다 <2-1> 물의 도시를 위하여- 서낙동강 뱃길 탐사

80년간 숨통 막혀 신음하는 강 … 끊어진 물길 흐르게 하자

 

서낙동강이 끝나는 지점에 설치된 녹산수문. 이 수문 때문에 서낙동강 물은 바다로 흐르지 않고 갇혀 있다

 

- 1934년 대저·녹산수문 건설   - 사람의 욕심 탓 생태계 파괴
- 신어천 등 산업폐수 쏟아내   - 모래 시꺼멓게 변하고 녹조

- 수안치등섬 습지식물 군락    - 왜가리·숭어 등 생명력 확인
- 농수로를 소하천 형태 복원   - 수질 개선 위탁사업체 필요

흐르지 않는 강. 1934년 대저수문과 녹산수문으로 숨통이 막힌 채 거대한 호수로 전락한 강. 서낙동강은 그렇게 생기를 잃고 신음하고 있었다. 사람의 욕심은 일천식(一川式)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려놨고, 80년 세월 동안 생태계는 망가졌다. 문명은 염치없게도, 또다시 서낙동강 변 부산 강서구 명지·강동·대저2동 11.88㎢(360만 평)에 에코델타시티라는 초대형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프로젝트의 명운은 문명이 망가뜨린 강, 서낙동강에 달렸다. 서낙동강을 살려내지 않고선 '물의 도시'는 불가능한 얘기다.

본지 취재팀은 지난 4일 오전 배를 타고 서낙동강을 둘러봤다. 이번 탐사엔 낙동강공동체 김상화 대표와 그린라이프 네트워크 백해주 대표가 동행했다. 서낙동강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줬다.

■자연의 악착같은 생명력

   
배는 낙동강 본류에서 동·서낙동강으로 갈라지는 대저수문에서 출발했다. 경남 김해에서 서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예안천과 주중천, 그리고 두 하천 사이에 있는 옛 북섬나루를 지나 수안치등섬까지는 수생태가 그나마 잘 보존돼 있었다. 2만3860㎢의 광활한 낙동강 유역, 그리고 1370개의 작은 하천들이 실어나른 가치들이 서낙동강 곳곳에서 목격됐다.

이 구간 수변부에선 강변 퇴적지 수생식물의 분포를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수안치등섬 주위로 매자기 부들 달뿌리풀 등 습지식물들이 군락을 이뤘다. 맞은편 서낙동강과 평강천이 만나는 곳에는 연잎들도 물 위의 밭을 형성했다. 덩치 큰 왜가리들도 배 엔진 소리에 놀란 듯 1m를 훨씬 넘는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흐름이 멈춘 강에서 생태계가 살아남기 위해 반응한 것으로 보였다.

김 대표는 "서낙동강이 원래부터 죽은 강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또 "이런 생태적 능력들은 아래쪽의 에코델타시티와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이곳의 물길은 결국 에코델타시티와 만난다. 이 같은 자연 생태를 염두에 두지 않는 에코델타시티 디자인은 곤란하다"고 꼬집었다.

■갇힌 물로 스며든 공포

   

그린라이프 네트워크 백해주(왼쪽) 대표와 낙동강공동체 김상화 대표가 대저수문을 출발하며 서낙동강 탐사 계획을 점검하고 있다.

 

 

대저수문~수안치등섬을 돌며 잠시 안심했던 취재팀은 불암교와 김해교를 지나면서 우울해졌다. 배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악취가 심해졌고, 녹차 가루를 풀어놓은 듯한 물 색깔도 그 농도를 더했다.

배는 중사도에 닿았다. 신어천 줄기를 찾기 위해 뱃머리를 서쪽으로 돌렸다. 배가 더는 접근할 수 없는 좁은 수로까지 진입했다. 그곳엔 '죽음과 절망'이 가득했다.

신어천이 서낙동강과 합류하는 지점. 이미 한여름을 넘겼지만 녹조는 극에 달했다. 수변부 위로 드러난 모래도 군데군데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김해 신어산에서 발원해 7.4㎞를 흘러온 물길, 신어천은 안동공단의 산업폐수 등을 서낙동강에 쏟아냈다.

신어천의 오염된 물은 중사도 바로 앞에서 서낙동강과 충돌한 뒤 그대로 정체됐다. 서낙동강의 수질을 '확인 사살'하는 꼴이다.

중사도 주변으론 갯버들 등 정수식물들이 널리 분포해 질소(N) 인(P) 등 오염 성분을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수문에 완전히 갇힌 물은 햇빛까지 받아 조류현상이 심각했다. 이곳에선 물고기도 볼 수 없었고, 물속엔 도무지 산소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이 먼저 흘러야 한다

   

서낙동강과 평강천이 만나는 평강수문 인근 물풀 위에 왜가리들이 앉아 있다. 김성효 기자

 

 

 

중사도를 뒤로 하고 치등을 지나 에코델타시티 예정지 쪽으로 향했다. 둔치도 뒤로는 김해를 거쳐온 조만강이 합류했다. 역시 오·폐수가 서낙동강으로 스며들었다. 신어천보다 오염 정도가 심해 보이진 않았지만, 흐르지 않는 서낙동강에는 치명적이었다.

그래도 배가 녹산수문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자 팔뚝만 한 숭어들이 셀 수 없이 머리를 내밀었다. 낯선 손님들을 경계하듯이 저마다 물 위로 정신없이 뛰어올랐다. 비록 녹산수문이 바다로 흐르는 서낙동강 물길을 끊어버렸지만, 이 구간이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기수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숭어 떼의 역동적인 모습이 전부는 아니었다. 백 대표는 "순아수문을 중심으로 배스 등 외래 생태교란 종이 대거 번식해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취재팀은 순아수문 근처에 배를 대고 내렸다. 에코델타시티 예정지 내부로 들어가기로 했다. 서낙동강과 연결된 샛강을 따라 에코델타시티의 중심을 관통하는 평강천 합수지점까지 걸었다. 순아교를 둘러싸고 세 갈래 물길이 만났다. 오래전 자연적으로 형성돼 삼각주를 적셨던 작은 물줄기들은 온통 시멘트가 발린 직각의 농수로로 변해 있었다. 그 주위로는 역시 녹조가 심각했다. 물은 본연의 성질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생태 회복이 희망이다

40년간 발품을 팔아 낙동강을 지켜온 낙동강공동체 김상화 대표는 3시간여에 걸친 뱃길 탐사를 마친 후 마음속에 품었던 말들을 풀어냈다. 그는 우선 "인간의 작업으로 이뤄지는 에코델타시티를 피할 수 없다면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만약 에코델타시티가 들어와서 서낙동강이 살아난다면 나쁘지 않은 논리"라고 했다.

김 대표는 자연과 인간의 '윈-윈'을 위해 몇 가지 필수조건을 제시했다. 그는 "80년간 우리가 버려뒀던 서낙동강을 이젠 치유할 때다. 수변구역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을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며 "앞으로 100년, 200년이 흘러도 낙동강 하구는 자연 공간이어야 한다. 서로 공존하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물길 회복'을 특히 강조했다. 김 대표는 "끊어진 물길, 사람이 만든 직각의 농수로를 소하천 형태로 복원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자연이 만든 실핏줄을 찾아 진정 '물의 소통'을 이뤄내는 것"이라며 "에코델타시티를 만든답시고 또다시 직선을 긋고 생태를 교란시킨다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에코델타시티에 어떤 건물이 들어오더라도 소화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에코델타시티로 1원이라도 이득을 보는 집단은 트러스트를 만들어 서낙동강 수질 개선에 투자하자. 정부도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번 탐사의 결론은 김 대표의 이 한마디 말로 요약됐다.

"서낙동강이 살아난다면 부산시민은 엄청난 문화를 즐기고 카타르시스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1300리를 쉼 없이 달려온 강물을 바다로 보내면서 떳떳하게 손을 흔들어줄 수도 있겠죠. 그렇게만 된다면, 부산의 희망은 분명 서낙동강에 있습니다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31009.2201118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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