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07
돈도 늙어간다
대한민국의 인구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금융 자본도 늙어가고 있다.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최근 고액 자산을 보유한 중ㆍ장년층들은 안전한 투자처를 선호하는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기업들은 여전히 불확실한 경제여건 속에서 투자 지갑 열기를 주저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 고도 성장기에 굽이쳤던 돈의 흐름이 역동성을 잃은 지 오래고, 자금 혈관에 이상이 생기는 이른바 ‘돈맥경화(credit crunch)’도 심화되고 있다. 신용경색의 징후가 나타나면서 우리나라도 일본식 디플레이션(물가하락을 동반한 경기침체)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만만치 않다.
일본 경제가 수년 동안 고통을 받고 있는 원인을 ‘노노상속(老老相續)’에서 찾는 시각이 있다. 사회가 고령화될수록 부모 사망 뒤 유산을 다시 은퇴한 노령 자녀에게 물려주게 되기 때문에 정작 돈을 써줘야 할 이들이 소비ㆍ투자에 의욕적으로 나서지 않게 되고 결국 금융 활력에 저해가 된다는 분석이다.
우리나라 역시 자산을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노령세대들이 늘어남에 따라 주식ㆍ채권ㆍ파생상품 등 투자성 금융상품에는 참여율이 떨어지고, 은행 예ㆍ적금 등 저리라도 안전한 재테크를 선호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 예금은 지난 6월 사상 처음으로 100조원을 돌파했다. 수신금리가 1~2% 수준의 초저금리를 기록하고 있지만, 섣불리 모험을 할 바엔 은행 계좌에 묵혀두는 개인투자자들이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투자에 선뜻 ‘패기’를 부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각에선 기업들이 벌어놓은 돈을 재투자하지 않고 곳간에 자물쇠를 걸어두고 있단 비판도 있지만, 기업들은 투자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항변한다.
경기 여건이 확연한 개선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고, 경제민주화 논의를 중심으로 정부의 규제가 촘촘해지면서 마땅한 투자처 찾기 힘들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예상 소비처가 없는 상황에서 공장이나 생산설비만 무턱대고 늘릴 순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최근 기업 총수들이 검찰수사 등 오너 리스크도 투자 위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투자 위축으로 기업예금은 지난 2분기 말 313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입지규제 등 ‘통 큰 완화’…기업투자 북돋워야 돈이 회춘한다
은행에 묵혀둔 예금은 313조 사상최대
예금회전율도 4.0회…2009년수준 못미쳐
국내·외 경기불확실성에 당국 압박까지…
위축된 기업투자심리 회복 최대 과제
노령화된 우리나라의 막힌 돈 혈맥(血脈)을 청소해주기 위한 첩경은 침체된 기업의 투자에 붐을 일으켜주는 것이다. ‘기업투자 활성화→고용창출→민간소비 활력’의 경기의 선순환 고리를 되살려 주는 것이 국내 자본의 흐름을 젊게 만들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투자 약(藥) 실종으로 굳어진 ‘자금혈맥’=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기업의 투자 저조와 이로 인한 자금 활력 상실은 위험도가 우려할 만한 수준에 와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제조업 설비투자실행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95로 100을 훌쩍 상회하던 2011년에 비해 하락한 상태다. 현대경제연구원이 국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투자지수를 조사한 결과, 올 하반기 투자 확대 가능성을 보여주는 투자추세지수(기준치=100)는 상반기 93.7에서 71.3으로 급락했다.
투자를 하지 않고 은행에 쌓아둔 기업예금은 지난 6월 312조9000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뒤 7월 현재 302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때문에 기업들의 자금 상황은 8년여 만에 가장 호전된 상황이다. 설비투자를 줄이면서 자금을 외부에서 빌릴 필요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한은의 ‘비금융 법인기업의 자금순환 자료’에 따르면 2분기 자금부족은 1조2000억원으로 전분기보다 무려 6조2000억원가량 감소했다.
기업들이 투자를 위해 은행에서 돈을 넣고 빼는 일이 줄어들게 되면서 예금회전율 역시 저조하다. 한은에 따르면 7월 현재 회전율은 4.0회를 기록하면서 석달 만에 4회선을 회복했지만, 5회를 상회했던 2009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예금회전율은 시중은행 계좌에서의 인출횟수를 근거로 일정기간 중 시장에서 돈이 얼마나 활발히 순환됐는지와 예금통화의 유통속도를 나타내준다.
통화승수도 여전히 미약한 수준이다. 7월 통화승수는 21.7배로 6개월 만에 20배 수준을 회복했지만, 27배까지 올랐던 2008년에 비해 여전히 저조한 상태다.
통화승수는 광의통화(M₂)를 본원통화(중앙은행의 창구를 통해 발행된 돈)로 나눈 것으로 본원통화가 낳은 통화 창출능력을 보여줘 전통적으로 통화 흐름이 얼마나 원활한지 보여주는 지표로 통용되고 있다.
▶“큰 규제 완화가 핵심”=현재 정부는 원활한 자금 흐름과 경기 회복에 대한 해법으로 재계 등 기업들의 투자를 주문하고 있지만, 기업 입장에선 신성장 산업이 보이지 않고 과거처럼 대규모 시설투자를 할 만한 사업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 글로벌 환경도 좋지 않는 데다가 내수 전망도 시계 제로이고 공정거래위원회와 검ㆍ경의 전방위적 압박도 투자 심리 위축에 큰 요인이란 분석이다.
정부는 세 차례에 걸친 투자활성화 대책으로 정부가 당장 풀 수 있는 투자 관련 규제는 거의 풀었다고 자평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기업들은 수도권 입지 등 ‘큰 규제’는 그대로 두고 ‘작은 규제’만 다루며 변죽만 울렸단 불만도 적지 않다. 이에 따라 지자체에서 반대하는 수도권 공장ㆍ업무시설 입지 제한 등 핵심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오현탁 정책금융공사 조사연구실 산업팀장은 7일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고선 기업들도 투자를 공격적으로 확대하긴 힘들 것”이라며 “동양그룹 등 큰 기업들이 유동성 위기를 겪는 경우를 보면서 다른 기업들 입장에선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 잃은 돈…예 · 적금통장에 넘친다
8월 은행수신 15조5000억 증가
원금보장형 금융상품에 투자몰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개인들의 위축된 투자 성향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미국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에 대한 우려 등 여전히 불확실성이 큰 국내외 금융시장이 개인들의 투자 심리를 움츠리게 만든다. 특히 저금리 기조가 확대되고 있지만 고수익만 좇는 고객들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최소한 원금은 지킬 수 있는 안전한 투자처가 대세로 굳었다. 소위 ‘중위험-중수익’ 상품이다.
▶길 잃은 돈, 은행에 넘친다=주식, 부동산에 몰렸던 자금이 대표적인 안전 자산인 은행의 예ㆍ적금으로 유입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은행 수신은 15조5000억원이 늘었던 반면 자산운용사의 수신은 석 달째 줄고 있다. 종류별로 주식형 펀드는 1조7000억원, 머니마켓펀드(MMF)는 1조1000억원, 채권형 펀드는 3000억원 등으로 모두 감소했다. 김인응 우리은행 투체어스 잠실센터장은 “주식에 투자했던 개인들이 환매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면서 “현금화된 자산은 은행의 단기상품으로 들어가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이른바 ‘단기 대기성 자금’이다. 투자할 곳이 생기면 쉽게 빼내 쓸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은행에 맡겨두는 돈이다. 실제로 8월 한 달간 은행의 정기예금은 5조9000억원, 수시입출식예금은 7조원 급증했다.
▶‘원금 보장’ 상품이 대세= 변동성이 큰 장세는 최소한 2~3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미국, 중국, 유럽 등 경제대국의 경기 전망이 여전히 어둡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산 운용도 당분간 보수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박승안 우리은행 투체어스 강남센터장은 “예전에는 고객들이 PB가 상담한 대로 믿고 돈을 맡겼지만, 지금은 추천받은 상품을 크로스체킹(교차확인)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면서 “고위험-고수익 투자를 회피하는 경향이 많다”고 말했다.
대세는 원금 보장형 상품이다. 예ㆍ적금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면서 잘못되더라도 원금은 지킬 수 있다. 가령 신한은행의 경우 만기 1년6개월짜리인 주가지수연계예금(ELD)의 금리는 연 2%로, 수익이 실현될 경우 연 6%까지 받을 수 있다. 1년짜리 정기예금 금리가 연 2.7% 수준임을 감안하면 매력적이다.
이관석 팀장은 “손실에 대한 깊이가 깊어지면서 원금 보장형 상품이 각광을 받고 있다”면서 “정기예금 비중을 70~80%로 하면서 나머지를 ELD와 같은 중위험-중수익 상품에 투자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주식투자자 줄어들고 투자연령은 높아지고
올 3분기 주식거래량 2006년이후 최저
개인투자자 연령도 47세서 48세로 ‘
한국 시장에서 ‘돈이 늙어가는’ 현상은 투자시장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주식 투자자 수는 갈수록 줄고 투자 연령 또한 높아지고 있다. 외국인의 강한 매수세로 코스피가 2000선을 넘어서고 있지만 펀드환매에만 바쁜 개인은 집값 문제 등으로 돈이 묶인 데다 웅진, STX, 동양 등 일련의 사태를 맞으면서 위험 투자에는 극도로 움츠러들고 있다. 수익률이 낮더라도 일부 안정적인 상품에만 돈이 몰리고 잠기는 모습이다.
한국거래소 집계 결과, 지난해 개인 주식 투자자수는 496만명으로 2011년 523만명 대비 5%가량 감소했다. 같은 기간 경제활동인구가 2488만명에서 2514만명으로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개인투자자의 평균 연령도 2011년 47.4세에서 2012년 48.6세로 올라갔다.
주식 거래대금은 지난해 1분기 하루 평균 25조6723억원에서 지난해 2분기 18조9905억원으로 급감한 이후 줄곧 하락세다. 주식 거래량 기준으로는 올해 3분기 하루 평균 거래량이 20억주에 그쳐 2006년 3분기(19억주)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전월세 가격 급등으로 인한 주거비 상승, 가계부채 확대에 따른 이자부담 증가 등으로 위험자산 기피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며 “9월 한 달 동안 개인은 3조1000억원을 주식시장에서 순매도했고 주식형펀드에서 2조4000억원을 환매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앞서 열풍을 일으켰던 중국 펀드, 자문형랩 등 투자 상품으로 인한 손해가 거듭되면서 투자자들의 불신이 커진 것도 증시 침체의 원인으로 꼽힌다. 여기에 동양그룹 사태까지 터져 가뜩이나 거래량 감소로 고전하는 증권사들은 투자자 이탈을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수익률이 낮더라도 원금 보장 등 안전성이 높은 상품은 인기몰이 중이다. 각 증권사들이 신규 투자자 유치를 위해 연 4%대 금리로 제공하는 특판 RP(환매조건부채권)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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