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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야기/독도는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

by SL. 2012. 7. 11.

 

대마도 정벌  

 

 

 

세종대왕

대마도 정벌은 가장 존경을 받은 위대한 왕 세종의 업적이기도 하다.

세종의 대외정책은 태조 이래의 명에 대한 사대와 왜·여진 등에 대한 교린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인 안정과 국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명외교에서는 처녀진헌과 금은조공을 폐지하는 등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의 요구를 거절했다.

한편 고려말 이래 골칫거리였던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했다.

두만강·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내게 하고 6, 4군을 설치, 이곳에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왜에 대해서도 1419년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으나, 1423년 삼포(三浦)를 개항하면서 회유책도 병행했다.

그러나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이를 통제할 목적으로 1443년 계해조약을 맺어 세견선과 세사미의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하며 철저한 왜에대한 강경책을 써왔다

최근 일본지도에서 대마도는 한국땅임을 인정하는 지도가 발견되다

 

 

지도 대마도 조선땅 인정이 핫뜨거 키워드로 꼽혔다. 자료사진

'삼국통람도설'은 일본인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381793)1785년 작성한 책으로, 일본과 그 주위 3(조선, 오키나와, 훗카이도),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에 대한 지도와 해설을 담은 '삼국접양지도' 5개 지도가 공개된 것인데, 그동안 일본은 1860년대 오가사와라 제도를 두고 미국과 분쟁하던 당시 독일 동양학자인 클라프로스가 번역한 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판을 증거로 제시해 영유권을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이 지도에서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일본 영토라 규정했지만, 울릉도와 독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적시한 것이다.

이 삼국접양지도는 과거에도 여러 연구자에 의해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 인용된 바, 그러나 당시 인용된 자료는 원본이 아닌 흑백 필사본으로, 대마도의 영토구분이 어려웠다.

그런데 원본에서는 분명히 대마도를 조선 땅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원본은 독도연구 전문가인 한상복 박사가 호주에서 구입한 것으로 추정되며, 김 대령은 이 지도를 국회도서관 독도 특별 전시관에서 찾았다

이로인해 자연스럽게 독도도 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이 된 것이다.

마침 이글을 쓰기전 대마도 정벌에 대한 인터넷 만화가 있더라.... 그래서 대마도 정벌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만화를 링크하면서 대마도 정벌을 이야기 해볼까 한다.

 

대마도 정벌의 역사

1419년 조선은 조선 최초로 해외원정을 벌이게 된다.

14196월 삼군도체찰사 이종무의 지휘아래 함선 227척과 병력 17285명으로 정벌군을 편성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선 것이다.

당시 대마도 왜구들은 조선의 정찰선단을 왜구선단으로 착각하고 환영연을 준비하다가 정벌군 본대가 접근하자 산악지역으로 대피한다.

조선의 정벌군은 적선 129척을 나포하고 가옥 1939채를 불사르고 왜구 114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러나 본격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왜구의 반격을 받아 아군 100명이 사상하는 등 피해를 입게 된다.

상륙작전시 많은 피해를 입자 대마도의 해상을 봉쇄하는 전략을 펼친다.

그러나 대마도 왜구들은 끈질기게 저항하였고, 정벌군은 불과 20일도 안돼 태풍을 우려해 조선으로 귀환하다.

조선은 2차 정벌을 계획하지만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아 정벌을 시행하지 못한다.

이후 조선은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이에 대마도는 군신의 예를 갖춰 조선을 대하게 되고 대마도 정벌은 마무리 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역사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배운적이 없을 것이다.

옆의 만화에서도 그 과정이 잘 드러나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란다.

내용을 보면 대마도 정벌은 패배한 전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패배한 전투가 패배한 전쟁이 되는 것은 꼭 아니다.

사실 세종대왕은 대마도 정벌보다 북방영토 개척에 관심이 더 많았다.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영역을 확보하고, 무리하게 강제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써서 영토로 편입할 정도로 북방 영토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며, 대마도 정벌은 대마도에게 군신의 예를 받는데 만족한 것이다.

즉 당시 조선의 국력은 강력했고, 충분히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군사적 위협만으로 끝난 것이다.

흑자는 보통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은 '실패한 전쟁'이라고 일컬어지게 되는 오역의 역사도 가졌지만 이 위협은 일본측에 잇어서 상당한 위험부담과 내부의 분열 및 내부의 공포감을 조성하여 100여년간 조선을 함부로 할 수 없었게 만들었다.

물론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설을 내세울 수 없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운 것은 당시 세종대왕이 북방 영토보다 대마도의 전략적인 가치를 이해하고 정벌하여 직접적으로 지배했다면 대마도는 조선의 영토에 완전히 편입되고, 일본 진출에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여 이후 '대항해시대'에 조선도 일정부분 영향력을 발휘하며 지금의 역사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세종대왕

 

휘(諱) 도( ). 자 원정(元正). 시호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소생.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군,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고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 동년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 ·경제 ·문화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하여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등의 청백리(淸白吏)를 등용하여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에 노력하여 의정부(議政府)의 독주를 견제했고, 왕립 학술기관으로 확장하여 변계량(卞季良) ·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趾)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등 장년층의 학자를 등용하여 정치 자문 ·왕실 교육 ·서적 편찬 등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궁내에 정음청(正音廳)을 설치,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으로 하여금 1443년(세종 25) 한글을 창제하게 하고, 1446년 이를 반포하였다. 또한 이천(李 )에게 명하여 경인자(庚寅字) ·갑인자(甲寅字) ·병진자(丙辰字) 등을 제작하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갑인자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활자이다.

초기에는 억불책(抑佛策)을 써서 5교(五敎) 양종(兩宗:천태종 ·조계종)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2종으로 통합하여 각 18개 사찰만 인정하고 경행(經行)을 금지했으나, 말년에는 궁중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승과제도(僧科制度), 경행을 인정하는 등 왕실 불교로 장려하여 불교 발달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음악(音樂)에도 관심을 기울여 1425년 관습도감(慣習都監)을 설치하고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하게 하여 음악을 장려하였다. 또한 실록(實錄) 보관을 위하여 춘추관(春秋館) ·충주(忠州) ·전주(全州) ·성주(星州)에 4대 사고(史庫)를 설치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과학기술에 대한 업적은 1442년 이천 ·장영실(蔣英實)로 하여금 우량(雨量) 분포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했는데, 이는 1639년 이탈리아의 B.가스텔리가 발명한 측우기보다 약 2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궁중에 과학관인 흠경각(欽敬閣)을 설치하고 과학기구를 비치하도록 했고,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물시계 등 각종 과학기구를 발명하였다. 김담(金淡) ·이순지(李純之) 등을 시켜 중국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 명(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참작하고 아라비아의 회회력(回回曆)을 빌어 역서(曆書)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편찬했고, 천문 ·역법(曆法) ·의상(儀象) 등에 관한 지식을 종합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이순지가 펴냈다. 경제 ·사회 정책면은 1436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각 도의 토지를 비척(肥瘠)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세율(稅率)을 달리하는 안을 실시했으나 결함이 많았으므로 1443년에 공법상정소의 안을 시정하기 위하여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풍흉(豊凶)에 따라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과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에 의한 수등이척법(隨等異尺法)으로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했으며, 전국의 토지를 20년마다 측량하여 양안(量案)을 작성하도록 했다.

그리고 의창(義倉) ·의료제도 ·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제정했고, 노비(奴婢)에 대한 지위 등을 개선, 사형(私刑)을 금하도록 했다. 대외정책면에서는 국가의 주권 확립과 영토확장에 진력한 치적을 들 수 있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處女進獻)을 폐지하는 한편, 명나라에 보내던 금(金) ·은(銀)의 조공물(朝貢物)을 폐지하고 마(馬) ·포(布)로 대신하도록 했다. 그리고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무력으로 강경책을 쓰거나 회유하는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두만강 유역의 여진은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구축하도록 하고 6진(六鎭)을 개척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1432). 압록강 유역의 여진은 최윤덕(崔潤德) ·이천 등으로 하여금 구축하게 하고, 4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때의 국경선이 압록강으로부터 두만강까지 확보되어 이 곳에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일본과는 1419년(세종 1)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게 했으며, 이후 쓰시마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사죄하고 통상을 간청해오자, 1426년 삼포(三浦)를 개항하였다. 이후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1443년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신숙주의 교섭으로 변효문(卞孝文)과 소 사다모리 사이에 계해조약(癸亥條約)을 체결하게 하여 1년 동안에 입항할 수 있는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제한했고, 세사미(歲賜米)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한편, 반드시 수도서인(受圖書人)에 한하여 왕래하도록 무역과 출입을 통제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陵西面) 왕대리(旺垈里)에 있는 영릉(英陵)인데 처음에는 광주(廣州)에 있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이 곳으로 옮겼다

 

 

 

세종대왕 업적

 

* 한글창제

- 유교 정치 실현과 문화 발전을 위해 집현전의 기능을 강화시키면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함

- 성섬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정인지 등의 학자와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함

 

* 과학발전

- 이천, 장영실 등을 시켜서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함

 

* 국방강화

- 북방을 개척하여 4군과 6진을 설치함

- 이봉무를 시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함

 

* 활자

- 이천에게 경인자, 갑인자와 같은 정교한 활자를 제작하게 함

 

* 음악

- 음악을 전담하는 기구를 설치함

-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 음악(아악)을 정리하게 함

 

* 농업발달

- 농업을 장려하고 농서를 펴내 농업 발달에 힘썼음

 

* 대외관계

- 명나라의 외교에서 실리를 추구함

- 여진족과 왜구에대해 강경 대응과 회유책을 동시에 사용함

 

* 역사

- 왕실의 역사를 보관하기 위한 역사책 보관소(사고)를 세움